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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다합에서의 느린 기록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처음에는 꽃도 보고, 바람도 맞으며 천천히 걷지만 저 멀리 무언가 반짝거리면 나도 모르게 그것만 보고 빠르게 걷게 되기도 한다. 혹은 내가 빠르게 걷고 싶지 않아도 친구나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쳐 함께 걷다 보면 그의 속도에 맞춰 빨리 걷기도 하고 말이다. 나 또한 여행 시작을 할 때는 게으름을 표방해 최대한 천천히 여유를 즐겼다. 그러나 세상에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또 새로운 사람들이 많은지 나도 모르게 걸음에 속도를 냈던 것 같다. 영국에서 터키, 터키에서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다시 터키로 돌아와 요르단까지 두 달 동안 미끄럼틀을 타 듯 여러 장소의 많은 이들을 만나고 다양한 것들을 보았다. 그렇게 힘차게 강을 래프팅 해서 도착한 바닷가는 너무 넓고 평화로워서 과연 내가 타고 온 그 강의 물이 이 바다가 된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도착한 이집트의 바다 마을 다합, 여행을 시작한 지 6개월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나는 잠시 이곳에 머물러 초심을 돌아보기로 했다.



  여행 164일 차, 2017년 9월 28일

  1-1 늦지 않은 아침에 일어나 조금은 센 것 같은 숙소 내 선풍기 바람을 누운 채 느낀다. 방을 함께 쓰는 많은 이들은 이미 침대를 비운 채 나갔다. 나는 아직 자리를 비울 생각이 없어 꺼진 조명 아래 무거운 몸을 그대로 두고 이곳을 지켰다. 자는 동안 흐트러진 침대 린넨 천을 좀 다시 펴서 누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몸은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1-2 오랜만에 배불리 저녁을 먹고 바닷가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음악도 함께 들을까 하여 이어폰을 챙겨 갔지만, 경쾌하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무언가로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 경쾌하지만 느긋한 파도의 소리에 맞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영어로 써져 있는 책이라 비록 세 페이지밖에 읽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한 자, 한 자 집중해서 읽은 독서였다. 들어가는 길에 달구경을 해야겠다.


  1-3 자유를 논하기 위해 성을 논한다. 일리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나는 남성으로 불리지만 나에게도 누군가가 구분해놓은 여성성이라는 것의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어떠한 남성성의 일면을 비교적 적게 가지고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남자인 나에게도 여성적인 면이 있고, 남성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 무엇이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여성성과 남성성은 누군가에 의해 이분화되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지향해야 마땅한 것으로 보이는 마네킹들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방금 언급한 소위 여성적인 것, 남성적인 것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애초에 함께 있던 여성성과 남성성이 자로 잰 듯 툭툭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으로 피를 흘렸다. 그렇기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알아보는 것은 이전에 잃었을 수 있는 온전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자유에 응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으로 가려진 다면을 찾을 수 있는 일 말이다.                                -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고서.




  여행 166일 차, 2017년 9월 30일

  2-1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라운지에 있는 고양이 가족을 관찰했다. 테라스에서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그 바람의 숨결 아래 그리고 꽃무늬 소파 위에 고양이 가족이 모여 있다. 엄마는 새끼들에게 젖을 주고는 그들을 핥아주며 같이 잔다. 조금 이따가 아빠는 자고 있는 새끼들을 깨워 깨물고, 장난을 친다. 그러다가 또 같이 낮잠을 잔다. 바람이 솔솔 불어 그들의 보송한 털을 간지럽힌다.


  2-2 생각을 관찰하면서 느낀 건 더 좋거나 더 우월한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더 좋은 생각을 갖겠다고 지금의 생각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본 소위 생각이 깊고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차원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회전 속도가 빠르고, 한 번 그 생각에 머물 때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싶다면,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생각을 잡으려 하기보다 대문 앞 아니, 내 방 안 아니, 내 노트 속 작은 생각을 먼저 쓸고 닦자. 


 여행 167일 차, 2017년 10월 1일

  3-1 계속해서 이어지는 평화로운 나날이다. 어느덧 9월을 보내고 10월이 왔다. 어젯밤은 왠지 모르게 중간에 자꾸 잠에서 깼다. 목이 아픈 게 감기 기운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세수와 양치를 대강 하고 터벅터벅 걸어 나와 숙소 앞 카페로 갔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오랜만에 그림을 조금 그렸다. 오래간만에 그리는 그림이라 그런지 뭔가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뭐든지 안 하다 보면 굳는 것 같다. 그래도 못 하는 실력으로라도 이것저것을 그리며 집중을 하니 기분도 몸 상태도 한결 나아진 기분이었다. 집중이 만병통치약인가?




 여행 168일 차, 2017년 10월 2일

  4-1 요즘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게 그렇게 재밌다. 아이들은 그냥 놔둬도 알아서 커질 몸을 최선을 다해 늘이며 움직인다. 이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목구비의 근육들이 깔깔거리며 얼굴 속 사방을 헤맨다. 더군다나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새 눈과 손, 그리고 다리는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을까? 어쩌면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어른들의 한탄은 이미 행동을 멈춘 자의 나태함 일지도 모른다. 진정 아이처럼 살고 싶다면 다시 나만의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몸뚱이로 새롭게 몸을 흔들면 누군가는 거북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커다란 몸뚱이를 어디에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아이가 되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입으로 남들의 더 거북한 시선을 와구와구 씹어 삼켜버릴까?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인 것 같다.


 여행 170일 차, 2017년 10월 4일

  5-1 빈둥빈둥 아침을 보내고 양치와 세수만 한 채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은 언제나 볶음밥 혹은 그냥 빵과 계란이다. 그들은 그 빵과 계란을 아메리칸 스타일 런치 어쩌고 하지만 그냥 빵과 계란이다. 점심을 먹고는 해변으로 나가 차 한잔을 시켜놓고 따뜻한 햇빛과 미지근한 바람을 느끼며 선베드에 눕는다. 누워 있다가 잠시 숙소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 해변으로 직행해서 물속으로 풍덩! 한다. 차갑다. 소원했던 물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 쉬엄쉬엄 10번 정도를 왔다 갔다 헤엄친다. 이제 조금 마음 편하게 나를 안는 바다. 그러면 신이 난 나는 물속에서 알 수 없는 몸부림도 쳐보고 그러면서 물결 위에 묻은 햇살도 보고 날아다니는 작은 물고기들과 인사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비어 있는 선베드가 외로워 보여 바다와 인사하고 나온다. 젖은 몸을 툴툴 털고 온몸으로 선베드의 햇살을 가려준다. 손이 좀 마르면 미리 가져온 시집을 꺼내 읽는다. 시집을 읽는 게 질리면 음악을 듣기도 하고,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고양이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을 탐구하기도 한다. 출출함은 나른함과 함께 뜨거운 차 한 잔으로 대체하고, 대신 하늘을 가득 물든 지고 있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해 이외의 모든 것은 잊는다. 옷이 다 말라갈 때쯤 이집트 스텔라 맥주 한 잔을 사들고 자주 가는 라멘 식당에 간다. 노르스름한 달이 검어진 하늘과 바다를 밟게 비춘다. 그럼 나는 흩뿌려진 달빛을 바라보며 스텔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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