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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죽으라는 법은 없다.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178일 차, 2017년 10월 12일

  3주 간의 이집트 여행을 마쳤다.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런던에서 만난 승진이 형과 함께 모로코 여행 일정을 미리 잡아놨기에 정한 날짜에 떠나야 했다. 아침 일찍 호스텔을 나와 우버택시를 불렀다. 이집트의 차량 번호는 아랍어로 되어 있어서 내가 부른 차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집중을 해서 번호판을 봐야 했다. 꽤나 긴장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혼잡 하디 혼잡한 이곳에 우버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인 일이다.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넘어올 때 택시 가격을 가지고 피 말리는 실랑이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고개가 저어진다.


  무사히 내가 부른 우버 차량의 번호를 그림 맞추듯 확인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 지난 아침이라 그런지 한적한 도로에 햇살이 밝게 떨어졌다. 여러 이집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카이로. 또 이곳에서 만난 반가운 사람 용규 형부터, 친근했던 호스텔 직원, 숙소 사람들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추억에 잠겨 있다 보니 금세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우버 기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들어가 내가 탈 튀니지 항공 카운터 앞에 줄을 섰다. 일찍 도착한 편인데도 사람들이 이미 꽤나 있었다. ‘다들 나처럼 모로코를 가는 사람들일까?’하는 괜한 궁금증을 가지며 나의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여느 때처럼 휴대폰에 미리 저장해 둔 예매 티켓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확인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조금 불안했지만 확인을 더 꼼꼼히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실 속은 빨리 짐을 맡기고 여유롭게 공항을 구경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항공사 직원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변을 주었다. 내가 예약한 비행 편이 오늘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설마 내가 다른 날짜에 온 건가 싶어서 티켓을 다시 확인해보았지만 오늘이 분명 맞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분명 예약을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턱 온 곳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직원은 내가 예약을 잘 못한 것이고 우리는 그런 비행 편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예약 사이트에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연락을 해보기 위해 예약 사이트로 들어갔지만 예약 사이트는 미국 회사였고 미국은 그때 시간으로 한밤중이었다.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메일을 보낸다고 한들 답변이 당장 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카운터를 감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을 불러 이 문제를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내 요구를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줄을 다시 기다려 한 번 더 확인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직원은 한 번 더 확인을 한 후에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그에게 따지듯 얘기했다. 그러자 직원은 갑자기 “No, English. Only Arabic.”이라고 하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영어로 얘기를 곧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노 잉글리시’라니,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들의 쪼잔한 대처에 오기가 생겼고, 문득 카이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용규 형이 떠올랐다. 공항 와이파이를 이용해 용규 형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용규 형은 나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이집션 선생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선생님은 직원을 바꾸어 달라고 했고, 직원은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아랍어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현지인과 전화를 했으니 문제가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 또한 결국 비행 편이 정말 없다고 하는 말 뿐이었다. 일단 형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직원은 나를 다시 불러 우선은 튀니지로 가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항공사는 튀니지 항공 사니 그곳에 가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 그냥 있는 것보다는 해결의 실마리가 조금은 더 있어 보였다. 나는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그에게 “Are you sure?”을 연장 외치며 짐을 맡기고 게이트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열린 결말의 여행에 어이가 없었다. 우선 모로코에 먼저 도착한 승진이 형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형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냐며 천천히 오라고 했다. 그래도 같은 대륙에 나의 이런 상황을 알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출국 절차를 다 마치고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데, 문득 되게 서러운 감정이 들었다. 튀니지에 가서도 모두 다 나의 상황을 모르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괜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정 안 되면 돈 더 주고 티켓 하나 또 사면되지, 뭐’하는 쿨한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런데 사실이 그랬다. 서러울 순 있지만 위험한 상황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에 올라 3시간 반 정도를 타고 튀니지에 도착했다. 계획에 없던 튀니지에서의 입국 절차를 마치고 튀니지 항공사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나 항공사 직원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좌절스러웠다. 티켓을 하나 더 사야 하나 싶었지만, 막상 그렇게 하자니 억울하고 새로 산 티켓으로 없어질 나의 여행의 며칠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방법이 없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흰색 아랍 전통의상을 입은 한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가 내게로 왔다. 


  그는 영어로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고, 나는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리고는 카운터 직원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처음에는 뭐랄까 수더분한 그의 모습이 공항 직원 같지는 않아, 나중에 돈을 요구하는 거 아닐지 걱정했다. 돈이 들더라도 비행기 티켓 값보다는 덜 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히 먹고 우선 그를 따라갔다. 그는 나를 어떤 사무실로 데려갔는데, 사무실 안에는 직책이 높아 보이는 한 중년 남성분이 넓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분이 정확히 어떤 직책을 가진 분인지는 모른다. 그 젊은 남자는 직책이 높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내 얘기를 차분하게 전했다. 나는 잠시 큰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식혔다. 설명을 다 들은 아저씨는 어딘가로 전화를 해서 무언가를 전달하더니 나에게 웃음을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년은 다시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고 나는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청년은 카운터로 가면 내일 아침 발 새 티켓과 묵을 숙소의 정보를 안내해줄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서 택시비 또한 항공사 측에서 제공하니 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카운터에 거의 다다를 때쯤 그는 “Good luck!”라고 외치며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가 돈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나는 고작 고맙다는 말만을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그의 말처럼 내일 아침 행 항공 티켓과 호텔 숙박권을 받았다. 정말로 전혀 계획에 없었던 튀니지에서 1박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여행 중 단 한 번도 묵지 못했던 호텔이라는 곳에서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종종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튀니지에서의 젊은 사람과 같은 조력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인생 참 혼자라고 느끼면서도 극단적인 순간에 이렇게 누군가 튀어나온다. 이것이 인류애 뭐 이런 것일까? 어렸을 적부터 많은 일들을 혼자 해내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 상황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갈 때면 쉬이 긴장하거나 좌절하곤 했다. 그러나 웬걸, 세상은 언제나 나 혼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사 죽으라는 법은 없다. 결국에 버티고 버티다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다 쏟아버릴지라도, 그 책을 주워줄 사람이 한 명쯤은 오게 마련이다. 그런 진땀 나는 상황에 누군가 걸어와 물 한 잔이라도 내주고 간다면, 그 힘으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걷다가 나도 또 다른 누구에게 물 한 잔 줄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이럴 때면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p.s 다음날 아침, 택시를 기다리며 로비에 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비행기를 못 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모로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이었다. 모로코를 가는 모로칸 사람을 만났는데 설마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갈 수 있겠다는 막연한 믿음과 함께, 나는 하루 늦었지만 무사히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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