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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선포합니다, 입추!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192일 차, 2017년 10월 26일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계속 여름에 있었다. 물론 4월의 베트남이 혹은 10월의 이집트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여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팔, 반바지만 입고 다녀도 땀이 흐른다면 그 계절은 내게 여름이었다. 하지만 오늘 모로코 페즈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타고 여름을 떠나 가을로 향했다. 입추. 반팔, 반바지로는 쌀쌀함이 느껴지는 계절 가을로 들어온 것이다. 선선한 공기와 함께 6개월 만에 느끼는 가을 속에서 나는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 시내에 내렸다. 큰 배낭을 메고 걸어도 땀이 흐르지 않는 가을이 꽤나 반가웠다. 그리고 향하는 숙소에는 가을만큼이나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 친구 민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193일 차, 2017년 10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찬 공기가 낯설면서 동시에 신선하다. 산뜻한 첫가을의 아침이다. 낯선 곳 낯선 날씨에서 가장 익숙한 건 고등학교 친구 민오였다. 민오는 독일 교환학생을 다니던 중 내가 스페인에 오는 날에 맞춰 이곳에 왔다. 고향 친구를 타지에서 처음 만나니 아침부터 수다가 쏟아지듯 나왔다. 바르셀로나가 이전 모로코, 이집트보다는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혹은 그저 친한 친구를 만나서 그랬는지, 오래간만에 제대로 무장해제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별 계획을 하지 않고 일단 거리로 나갔다. 에스파냐 광장을 지나 라 람블라 거리까지 걸으며 그동안 못한 수다를 떨었다. 파란 하늘에 시원한 바람, 산책하며 수다 떨기 딱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빠르게 파스타로 끼니를 때우고 포트벨 항구 스타벅스에 가서 아예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떨었다.


  나는 여행을 하며 일어났던 에피소드와 그때의 감정들을 민오에게 얘기했다. 나는 어쩌면 그저 일어났던 일들을 전했을 뿐인데, 민오는 생각보다 많이 놀라워했다. 그는 나의 얘기를 다 듣고는 여행을 정말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었다. 친구한테 진심을 전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낯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 중 한 명이 나의 그간의 경험과 영감을 공감해주는 것 자체가 참 뿌듯했다. 6개월 간의 여름 뙤약볕 아래서 걸어온 나의 행보들이 문득 의미 있게 느껴졌다. 물론 의미를 가지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민오의 진심 어린 반응 덕에 문득 온 길을 돌아보니 나름 따뜻하게 빛이 나는 길이었다.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나름의 그간의 열매들을 처음으로 수확한 순간이었다.



  여행 194일 차, 2017년 10월 28일

  푸름을 지나 붉음의 단계로 들어서는 바르셀로나의 가을은 정말로 완벽했다. 우리는 마치 남산을 올라가는 기분으로 몬주익 성으로 올랐다. 언덕 위 견고히 지어진 성에 오르니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반대편에는 지중해 바다가 짙은 파란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역동적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사진도 찍고, 때로는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몬주익 성에서의 감상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창밖 햇빛 가득한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버스에서만 그것을 보고 지나가기엔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스탑 버튼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큰 가로수들과 숲으로 가득 찬 길을 걸으며 자체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내려가는 길에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도 있어서 기념사진도 찍고, 글에 담기도 민망한 무의식에서 나온 농담도 던지며 천천히 시내로 걸어 내려갔다. 


  여행 195일 차, 2017년 10월 29일

  민오의 스페니쉬 친구가 탑 쌓기 이벤트를 강력 추천해서, 오후에는 그 친구가 알려준 장소로 가 탑 쌓기 이벤트를 관람하기로 했다. 사진으로 먼저 본 바로는 대규모의 사람들이 협동하여 더 높은 탑을 쌓는 대결을 하는 것이었다. 대규모인 만큼 관객들도 많아 엄청 혼잡할 것 같았다. 그래도 스페니쉬 현지인이 추천해준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알려준 장소로 갔다.


  그런데 도착한 장소는 생각보다 작은 공원이었다. 적어도 스타디움이나 드넓은 들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꽤나 반전이었다. 알고 보니 이번 이벤트는 작은 공원에서 열리는 마을 단위의 행사였다.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났다. 대규모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사람들이 샅바 같은 끈을 맨 채 모여있었다. 우리는 더 모이겠거니 생각하고 근처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인원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고, 그렇게 작은 마을 탑 쌓기 대회가 시작됐다.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래서 조금은 놀랐다. 처음에는 일부 인원들만 탑 쌓기를 하더니 다음에는 두 팀 전원이 순서대로 대규모 탑 쌓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밑에 많은 사람들이 서있고 윗부분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여자 학생들이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올랐다. 집중을 하는 어린 학생들의 눈빛은 오르는 것 자체에 오로지 고정되어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침묵을 한 채 그녀가 짚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했다. 마침내 그녀는 탑의 꼭대기 위에 섰고, 많은 이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우리도 그들의 열정적인 퍼포먼스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처음에는 규모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설픈 대규모의 퍼포먼스보다 때로는 한 명의 순전한 집중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도 뜨거운 하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지는 그 순간을 함께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어쩌면 더 귀중한 것이다. 나는 얼마나 순간에 몰입을 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었다.



  여행 196일 차, 2017년 10월 30일

  오늘은 민오가 독일로 돌아가는 날이다. 라 보케리아 시장에서 타코랑 하몽을 먹고 커피 거리로 가 마지막 수다를 떨었다. 며칠간 민오는 못 본 사이에 내가 많이 성장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글쎄, 나는 매일 보는 나로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성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까운 친구가 내게 나만의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얘기를 해주니, 여행 못 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독일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지만, 좋은 날씨에 함께 시간을 보낸 탓인지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4일 간 정말 무장해제하고 재밌게 놀긴 했나 보다. 


  그렇게 민오를 공항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내가 입을 그저 꾹 다물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을 혼자 그렇게 꾹 다물고 보냈었지만, 오늘의 그 침묵은 꽤나 낯설었다. 어쩌면 침묵하는 내가 내 여행의 일상이었을 텐데 말이다. 여행 속 여행을 마친 기분이었다. 며칠간 이렇게 수다스러웠던 적이 없으니, 그도 그럴만하다. 어찌 되었건 다시 혼자가 되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 그의 안내로 반년의 열매의 수확을 거두었으니 다시 나머지 반년의 농사를 지으러 가봐야겠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빠져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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