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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Listen your body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201일 차, 2017년 11월 4일, 순례길 1일

  비가 부슬부슬 내린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시원하게 내려앉은 안개를 뚫고 드디어 첫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골길만 펼쳐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작은 찻길이었다. 생각보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찻길이라 내 목소리를 들을 사람은 없어 보여서 지금의 설렘을 담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치 방에서 혼자만의 오케스트라를 여는 것처럼 말이다. 관객은 초록색 산과 흰 안개였다. 이제 정말 새로운 테마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길을 걷다 보니 중간에 마트가 있었다. 어제 자기 전 다짐대로 나는 저녁 만찬으로 먹을 돼지고기를 사서 검은 봉투 째 가방에 걸었다. 또 다른 목표가 생겨서 재미가 더했다. 이 길에 끝에서 지글지글 구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고기가 든 봉투를 대롱대롱 달고 다시 찻길과 산길을 걸어 올랐다. 중간 마을인 발 카를로스를 지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로 향했다. 사실, 잠깐 그냥 발 카를로스에 머물까 고민도 했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체력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저 잠시 머물러 풍경 사진만 조금 담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일정의 진면목은 발 카를로스 다음에 있었다.


  발 카를로스를 지난 다음부터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중간에 가끔씩 평지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우직하게 걸음을 옮겼지만 오르막길은 더 우직했다.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좀 오래 쉬고 싶기도 했지만 산길에 비도 내렸어서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산 길이었기에 해가 지면 마을을 찾기에도 위험했다. 나는 이전에 친구가 추천해준 MIKA의 Grace Kelly과 Queen의 여러 노래들을 들으며 걸음의 박차를 가했다. 신나는 음악들을 들으니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다른 길에서 한국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창 음악으로 텐션을 올리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먼 타지, 이 깊은 산속에서 그건 너무 정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먼저 내게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얘기를 시작하며 걸었다. 그는 나보다 1살이 많은 형으로 순례길을 하기 위해 며칠 전 한국 대구에서 프랑스 파리로 입국했다고 했다. 단언컨대 몇 년 간 내가 만난 사람 중 사투리가 가장 옴팡진 분이었다. 그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마다 조금씩 뒤로 처졌다. 가만히 보니 배낭이 거의 로켓 수준으로 컸다. 가방 무게를 물어보니 19kg이라고 했다. 가히 뒤처질 수밖에 없는 무게의 배낭을 메고 그는 반 이상을 걸어온 것이다. 그는 많이 지쳤는지 내게 물을 한 입 마셔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에게 물을 건넸다. 비가 가끔 내려서 그랬는지 갈증이 그렇게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에서의 만남을 기약하고 다시 각자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지금 쯤이면 마을이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파이팅 있는 노래도 그렇게 힘이 되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을보다는 겨울 느낌이 나는 무채색의 축축한 길을 처벅처벅 걸었다.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빼기도 귀찮아서 그냥 놔둔 채 문득 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틀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내가 몸에 힘을 굉장히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쁜 날씨에 좋지 않은 환경을 걷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목표만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에 힘이 조금 풀리고 그 공간에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그저 걷기에 집중해서 걸었다. 많은 감정들이 잔잔해졌다.


  마침내 산속 큰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 명 이상을 수용하는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였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넓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노부부가 옅은 미소로 나에게 방을 안내해주었다. 그들에게 미소는 그저 예의 그 이상이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하루의 끝에서 만난 그들의 미소는 내게 순례자로서의 무언의 소속감 같은 것을 처음 느끼게 해 주었다. 고작 하루 걸은 감상치 고는 조금 오버스럽긴 하지만 그때의 기분이 그랬다. 더 중요한 것은 드디어 고기를 먹을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야호!



  여행 103일 차, 2017년 11월 6일, 순례길 3일

  오늘은 주비리라는 마을에서 팜플로나까지의 일정이다. 생 장 삐드뽀흐를 가기 위한 과정에서 이미 하루 묵었던 팜플로나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진짜 순례자의 신분으로 다시 그곳을 가면 어떤 기분일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은 대부분의 코스가 평지 혹은 내리막 길이었다. 평소에도 천천히 준비를 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로 아침에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더욱 여유 있게 주비리를 떠났다. 


  평소처럼 노래를 듣기도, 흥얼거리기도 하며 길을 걸었다. 평지가 많아서 걸음이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이런 길이라면 몇 일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일까, 이어폰 속 음악에 리듬을 타다가 진흙을 보지 못하고 밟아 버렸다. 밟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그 순간 오른쪽 발목이 삐끗했다. 처음에는 발목에 순간 체중이 실린 정도의 충격이라고 생각하고 발목을 좀 풀어주며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계속되는 내리막길에 발목이 점점 더 시큰거렸다. 오르막길에도 아닌 내리막길에서 고생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내리막길의 그 경사가 부담스러워 금방 직진할 수 있는 길을 지그재그로 천천히 걸어 내려와야 했다. 결국에는 팜플로나에 입성하지 못하고 근처 아레라는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했다. 순례길 시작한 지 3일 만에 부상이라니, 그것도 평지와 내리막길이 가득한 곳에서. 믿을 수가 없었다. 순례길에 온 것이 조금은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걷는 것은 자신이 있어서 빠르게 완주하려고 했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웬만한 순례자들은 그냥 지나치는 아레의 작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기도를 하는 공간을 지나 계단을 타고 올라 도착한 방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짐을 풀고 다시 나왔다. 발에 힘을 주면 너무 쑤셨다. 빠르게 약국에 가서 약도 사서 바르고, 슈퍼에서 단백질 보충을 위해 생닭다리도 샀다. 오늘은 닭과 야채를 푹 끓여서 오랜만에 몸보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돌아와, 수건을 라디에이터에 데워서 찜질을 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발목은 더욱 욱신거렸다. 바글바글했던 이전의 숙소들과는 달리 너무나도 허전한 아레의 알베르게에서 아픈 밤이었다. 내일은 과연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닭고기 먹고 푹 쉬어보아야겠다. 춥다, 추워.



  여행 204일 차, 2017년 11월 7일, 순례길 4일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인 게 진짜 생각보다 별로 없다. 밤 중에 라디에이터가 꺼져 식을 대로 식은 방에서 아침을 맞았다. 다쳤다는 것을 잊은 채 침대에 나와 걸음을 걸었다. 통증이 그대로다. 그래도 잠을 푹 자서 몸 상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팜플로나까지는 그리 멀지 않기에 어찌 되었건 그곳까지는 가보기로 결정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화창하다. 다리는 아파도 햇살이 주변 풍경을 돌아볼 여유를 가져다준다.


  아레의 시내를 통과할 즈음 한 잡화점에서 폴과 지팡이를 파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싼 막대기라도 있으면 살 생각으로 잡화점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다이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던 그 잡화점에는 몇 가지 종류의 트레킹용 폴을 팔았지만 가격이 꽤나 비쌌다. 그런데 그 옆에 노인들이 쓸 법한 나무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지팡이의 가격은 5유로. 트레킹용 폴에 비하면 많이 짧은 지팡이었지만 손잡이에 나름 용 모양 장식도 있었다. 나는 그 나름의 디테일이 마음에 들어 5유로를 지불하고 지팡이를 샀다. 사실 처음에는 이걸 산다고 큰 소용이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막상 발목의 부담을 지팡이로 분산시키니 그 고통이 덜했다. 역시 무엇이든지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지팡이가 나눠주는 그 중력은 나에게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화창한 날씨의 오늘, 나는 평소 걸었던 거리의 5분의 1도도 안 되는 4km 남짓의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꼭꼭 씹 듯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팜플로나와의 두 번째 만남. 초면은 아니라서 그런지, 혹은 전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참 반가웠다. 발목 통증의 악화를 막기 위해 오늘은 여기서 일정의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저번에 묵었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첫날에 만났던 대구 승민 형과 또 중간중간 얼굴을 마주했던 다른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례길 중 제법 큰 도시인 이곳에서 하룻밤 더 묵고 일정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승민 형의 제안으로 우리는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각자 라면에 해물을 넣어먹자고 했다가 라면이 칼국수가 되고 칼국수가 수제비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바지락 칼국수와 전을 부쳐먹기로 했고 밀가루 반죽까지 하며 나름 특별한 저녁 만찬을 즐겼다. 승민 형과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음식과 와인을 나누었다. 여러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것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이전에 이곳에 처음 왔던 것이 기억이 났다. 모르는 순례자들 속에서 혼자 누워 이 길에서 따뜻함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슬며시 떠올렸던 때를 말이다. 물론 처음 만난 이들과 아직도 조금은 어색하지만 사람이 있는 어느 곳이든 그저 차갑기만 한 곳은 없는 것 같다. 인생 어차피 혼자라지만, 가끔은 이렇게 다른 인생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며 케이스 스터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행 206일 차, 2017년 11월 9일, 순례길 6일

  발목 회복이 안 되어서 팜플로나에서 하룻밤을 더 잤다. 오늘은 그래도 발목이 조금 회복된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중간에 자주 쉬면서 가면 다음 마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하루 반을 쉰 것이지만 되게 오랜만에 걷는 기분이었다. 쉴 동안 그렇게 맑더니 오늘은 또 비가 조금씩 내린다. 당황하지 않고 중간에 작은 마을들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하며 여유로이 휴식을 취하며 걸었다. 휴식 시간에는 보통 1.6 유로 정도 하는 라떼를 마시고 어깨, 허리, 다리 이곳저곳을 쭉쭉 늘리며 몸을 풀었다.


  다치면서 새삼 느낀 것은 내 몸이라는 것도 내 자체가 아닌 나를 담는 렌터카와 같다는 것이었다. 한 평생용 렌터카. 몸이 내 생각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다루고 종종 달래줘야 한다. 이전에는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몸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러지 못할 상황도 충분히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걷고 싶어도 쉬이 걷지 못하는 길 위에서, 어느 때 보다 적극적으로 내 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요즘이다. 그렇게 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며 스트레칭을 마치면 벗어 놓았던 경량 패딩 조끼를 다시 입고 배낭을 멘 후 가슴 끈을 채운다. 비는 그새 머져서 우비를 정리해 배낭 옆주머니에 넣어두면 다시 걸을 준비 완료! 마침 비도 그치고 나이스 타이밍의 휴식이었다.


  하지만, 역시 타이밍이 항상 나이스 한 것만은 아니다. 오늘 일정의 메인이벤트인 용서의 언덕 (Mirador Alfo del perdon)을 오르려 하자, 다시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멀리 언덕 위 풍차들이 빠르게 돌아갈 만큼 바람 또한 거세졌다. 평소에는 배낭까지 충분히 덮는 우비지만 오늘만큼은 성난 바람에 자꾸 뒤집히곤 했다. 그때그때 팔으 뒤로 뻗쳐 우비를 다시 배낭에 씌우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며칠 전에 산 지팡이 덕에, 금방 꼭대기에 올랐다. 물론 성난 비바람에 떠밀려 언덕 위에서의 풍경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금세 내려가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무사히 다음 도시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고요한 마을로 들어섰다. 알베르게 근처에 도착해서야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 팜플로나에서 한 번씩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나는 짐 그리고 몸을 순서대로 풀고, 따뜻한 물로 온몸에 땀을 씻어냈다. 그러고 나서는 마트로 가 소고기 500그램과 쌀을 샀다. 몸의 회복을 위해서 단배질 보충은 필수다. 이제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냄비밥을 짓고 소고기를 불에 스치듯 쓱 구워서 입 속으로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점심을 항상 간단하게 먹기에 푸짐한 저녁을 먹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렇게 저녁 만찬을 마치고 몸을 다시 풀고 오늘의 하루를 일기에 적었다. 오로지 내 몸을 위해서 집중하는 요즘이다.



  여행 208일 차, 2017년 11월 11일, 순례길 8일

  아직도 발목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오늘 또 걸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래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몸을 쭉쭉 풀고 까미노 길에 올랐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져서 그런지 몸도 쉽게 굳는 것 같다. 걷기 시작하긴 했지만 확실히 무거워진 몸을 느끼며 내일은 꼭 하루를 더 쉬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에스떼야에서 로스 아르코스로 가는 오늘의 코스에는 이전보다 순례자들이 더 많아 보였다. 특히나 삼삼오오 모여 걷는 중년층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마치 단체 투어로 온 것 같은 이들을 관찰하다가 한 나이 드신 프랑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 뻘쭘하여 ‘Hi’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아주고는 까미노에 처음 왔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응원한다고 하며 자신은 15년 전에 처음 이 길을 완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나눠 걷고 있다고 했다. 한 번에 다 걷는 것이 아니더라도, 천천히 자신의 목표를 이뤄나가는 그녀가 멋있었다.


  아주머니는 내 걸음이 빠르다며, 먼저 가라고 했다. 그러고서 그녀는 ‘Listen your body’ 이 말만 생각하고 걸으라고 조언해주었다. Listen my body. 까미노에서의 정답에 가까운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처럼 내 몸에만 집중을 한 적이 없었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욕심의 속도가 걸음의 속도를 추월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말처럼 쉬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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