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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콜라맛 젤리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228일 차, 2017년 12월 1일

  독일에서 야간 버스를 탄지 12시간 만에 덴마크 콜링에 도착했다. 이곳 콜링에는 대학교 동기인 찬기가 어학연수로 체류하고 있는 곳이다. 이전에 찬기는 나의 여행 소식을 접하고 나에게 덴마크에 꼭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바로 콜링행 버스 티켓을 예매했더랬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여행에는 결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물가가 비싼 북유럽의 나라 덴마크에 온 것이다. 연두색 플릭스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12시간 동안 앉아 있어서 몸이 찌뿌둥하기도 했고, 다시 14kg짜리 배낭을 매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낭을 메고 와이파이존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정류장 근처 우체국이 프리 와이파이존이었다. 이제 와이파이 기생의 삶도 어색하지가 않다. 나는 곧장 찬기에서 보이스톡을 걸었다. 그는 전화 너머로 나를 반기며 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오라고 했다.


  찬기는 나의 편견을 제대로 깨부수어 준 친구다.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신입생 때 그는 학점은 둘 째치고 수업을 나오면 다행인, 속된 말로 ‘노답’처럼 보이는 친구였다. 실제로 학술제 같은 팀을 하면서도 그를 보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성실함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파악하는 주요한 잣대였는지, 속으로 ‘쟤는 왜 저럴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물론 그의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에 과 내 존재감은 꽤나 강렬했던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를 그저 노는 걸 좋아하는 친구 정도로만 치부했었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문득 찬기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으니 그는 잠시 내 방으로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에게 무언가 의견을 묻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1:1로 무언가를 얘기해본 적은 없는 사이였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몇 분 후 그는 내 방으로 왔고 자신이 UCC 공모전에 낼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어떤지 한 번 봐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혼자서 여러 영상 공모전에 출품하며 자기만의 재미있는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주며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신이 나서 자신이 해왔던 여러 이야기들을 나에게 해주었다. 나에게 자신의 것들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한 바탕 대화를 끝내고 그가 떠난 후, 나는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편견이 보기 좋게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수업에는 불성실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삶 전체에 불성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진취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입시 준비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정해진 수업, 학습에 성실한 자를 주체적인 사람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학교를 가면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도 찬기와 같은 친구들 덕에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은 단면이 아니고 다면이기 때문이다.


  기차역이 가까워졌다. 막상 가까워지니 그냥 친구를 만나는 것인데도 조금 떨렸다. 역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육군 모자를 쓴 찬기가 있었다. 그는 긴 머리에 수염을 잔뜩 기른 내 모습을 보고 여행자 다 됐다며 웃었다. 우리는 그간의 이야기를 하며 들어가는 길에 간단히 장을 보았다. 그는 나에게 “여행 다니면서 이런 거 못 먹었을 거 아니야?”라고 하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젤리를 집었다. 딱히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장을 본채 찬기네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흰색의 소박한 빌라였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 정겨운 느낌도 있었다. 그는 미리 갈릭소스에 재워 둔 닭고기 요리와 아스파라거스 볶음을 완성해 흰쌀밥과 함께 나에게 대접해주었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뜨거운 흰쌀밥이었다. 물론 맛도 일품이었다. 배가 부르니 행복했다. 


  밥을 다 먹고 쉬는데 찬기가 아까 사 온 젤리를 내게 건넸다. 콜라맛 젤리인데 겉에 새콤한 가루가 묻어 있어 정말 맛이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뭐, 젤리가 젤리겠지.’하고 입에 가져다 댔다. 찬기의 설명대로 젤리는 새콤 달콤한 맛을 내며 혀를 자극했다. 환상적이었다. 분명 처음 느끼는 맛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이런 류의 사치는 부린 적이 없기에 처음이라 할 만큼 굉장히 황홀했다. 찬기도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맛있지?”하며 큭큭 웃어댔다. 그냥 젤리를 하나 먹은 것인데 순간 행복이 밀려들어왔다. 군것질 하나로도 사람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니, 아무래도 삶이 팍팍할 때면 종종 젤리를 찾을 것 같다.



   여행 D+238, 2017년 12월 11일

  ‘휘게’는 덴마크어로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한다. 며칠 동안 나는 이곳에서 휘게 라이프를 제대로 즐겼다. 찬기가 오전에 어학원에 가 있을 동안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백숙, 짜장밥 등의 아침 겸 점심 요리를 해 찬기가 오면 같이 먹었다. 방도 거저 쓰는데 요리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간단히 씻고 그동안 못 본 한국 영화들을 한, 두 편 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담백한 한국 영화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서는 해가 지기 전 산책 겸 밖으로 나가 자주 가는 레마 1000 마트에서 내일 먹을 장을 보고 오고는 했다. 때로, 찬기가 쉬는 날에는 함께 촬영일을 가거나 콜링 성 등을 산책하기도 했다. 물론 콜라맛 젤리는 생각날 때마다 사 먹었다. 


  찬기와 나는 마치 신혼부부처럼 오늘은 뭘 해먹을지 고민해서 매일 나름 근사한 저녁 만찬을 만들었다. 계속 떠돌아다니고 있던 나로서 실내에서 즐기는 이런 휘게 라이프는 굉장한 아늑함을 주었다. 물론 내가 지낸 것은 고작 몇 주에 불과하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날씨 때문이라도 실내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동안 콜링에는 대부분 비나 눈이 내렸다. 북유럽이지만 비교적 낮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어 걱정만큼 춥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습하고 안개가 많이 껴 밖에서 활동을 오래 하기에는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짧게 있었던 나 조차도 날씨가 흐리면 그냥 방에서 비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안락함을 즐겼으니 말이다.


  그렇게 10일 간 이어진 휘게 라이프에 살짝 몸이 찌뿌둥해질 찰나, 찬기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바로 레고 하우스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레고가 미국 회사인 줄 알았는데, 본사가 콜링 근처 빌룬드라는 도시에 있었다. 찬기가 덴마크로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레고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래서 덴마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찬기는 이미 레고 하우스를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여러 가지 레고 블록 체험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입장료가 한화로 35000원 정도로 꽤 비쌌지만, 지금까지 돈을 많이 안 쓰기도 했고 레고의 발상지에 와서 본사를 안 보고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찬기의 입바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침 8시에 일찍 일어나 마트에 파는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밥까지 든든하게 말아먹었다. 그러고 나서 빠르게 씻고 빌룬드행 버스를 타러 나갔다. 1시간 남짓 걸리는 근처 도시를 가는데 버스 교통비가 왕복으로 24000원 정도 되었다.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갈색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하얀 눈들이 쏟아지는 것이 퍽 예뻤다. 드디어 버스가 왔다. 찬기는 멀미가 있어 일찍 잠에 들었고, 나는 좌우로 펼쳐진 설경을 바라보며 덴마크만의 분위기를 즐겼다. 


  드디어 우리는 빌룬드에 도착했다. 조금은 휑한 마을에 정말 새하얀 외관으로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레고 하우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근처 마트로 가 빵과 살라미를 사서 챙겼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기에 미리 저렴하게 먹을 것을 구해놓는 것이 현명했다. 드디어 레고 하우스에 입장했다. 어렸을 적 가장 익숙했던 장난감 중 하나인 레고의 본고장에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설렜다. 찬기 또한 마치 처음 와보는 사람처럼 들떠있었다. 먼저 이곳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지루할 수 있는 역사관으로 갔다. 알아야 할 것들을 미리 알고, 노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역사관에는 3대째 이어진 창립주들의 이야기와 그동안의 레고 시리즈를 전부 볼 수 있었다. 찬기는 소위 레고 덕후답게 레고와 관련한 여러 가지 부연설명들을 나에게 해주었다. 아이들의 상상을 실현시켜주는 다리가 되어준다는 중심 생각 하에 여러 위기들을 대응해나가며 지금까지 장난감 브랜드의 대표가 되어 있는 역사가 멋있었다. 그리고 그런 레고를 좋아해 이곳 덴마크까지 온 친구와 함께여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더욱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레고의 역사 탐방을 마치고, 마스터피스 관부터 나머지 4개의 존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스터피스관은 아티스트별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엄청 큰 3개의 레고 공룡이 눈에 띄었다. 공룡의 뿔을 다람쥐, 꽃 등으로 표현한 것이 귀여웠다. 찬기도 신이 나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레고 폭포가 있는 레드 섹션에 갔다. 크리스마스 컬러로 레고를 조립할 수 있는 존에서 우리는 아무 말없이 레고 조립에 집중했다. 찬기는 입체적인 모양의 트리를 나는 눈 쌓인 빨강 달팽이를 만들었고, 각자의 작품을 들고 레고 폭포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또 레고 폭포 왔으면 한 번 빠져봐야 한다고 해서, 신발을 벗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너무 아픈 특별한 경험이었다. 


  잠시 라운지로 나와 아까 사 온 빵과 살라미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머지 세 개의 관을 이어서 체험했다. 레고로 물고기도 만들고 꽃, 미래 건물도 만들었다. 레고 티를 입고 온 찬기는 헤드폰을 쓴 채 아이처럼 레고에 몰두했다.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우리는 마감 시간에 등 떠밀려 체험존을 나왔다. 마지막에는 방문 기념으로 6개의 빨간색 블록과 그 블록들의 조합 중 하나의 그림을 카드로 만들어 주었다. 6개의 블록의 조합은 9억 개였다. 내가 9억 개의 조합 중 하나를 갖게 된 것이다. 사실 엄청 별 것 아닌데도 괜히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찬기처럼 레고의 특정 에디션까지 알 정도로 팬은 아니지만, 오늘 방문을 통해 왜 그가 그렇게 레고를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레고는 한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어낸 그 행동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 행동을 하는 사람 자체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아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정신없이 몸만 커버린 어른에게도 삶의 본연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준다. 오랜만에 찬기와 아이처럼 놀면서, 또 정말 아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쫓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면 정말 무아지경에 빠진 아이처럼 신이 나서 그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근에 나는 무언가에 그 정도로 미쳤던 적이 없다.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자제했다. 그것을 효율적이지 못한 일로 여겼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빠져버리면 해야 할 일에 지장이 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적 세계 지도 속에서 다른 나라들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동물 백과사전을 몰래 학교에 가져가 읽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마다 족족 벽에 붙여 두기도 했다. 확실한 건 해야 할 일만을 해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이 어른의 무게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어른과 아이는 다르다. 그렇다면 어른은 의무 속에서 무기력해져야만 하는 존재인 것일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렸을 적 좋아하던 콜라맛 젤리를 절대 먹을 수 없는 것일까? 언제부터 나는 예전의 그 달콤한 콜라맛 젤리를 아이들이 먹는 것으로만 치부하고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앞으로만 걷게 된 걸까?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끔 젤리를 먹는다고 해서 이가 바로 썩거나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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