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몸이 하는 기억은 머리가 하는 것보다 때로는 은밀하면서도 강렬하다. 머리는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수 있지만 많은 만큼 때로는 서로 뒤섞여 원본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여행 310일 차, 2018년 2월 21일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의 네 번째 날이다. 바깥으로 나오면 항상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도시를 둘러싼 높은 산들과 안개다. 해발 2850m에 위치한 키토는 그 자체로 꽤나 높은 고산도시였다. 누군가는 이 높이에서도 약간의 고산병 증세를 보인다고 들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별 탈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에콰도르 친구 데이비드, 칠레 친구 나쵸와 함께 케이블카인 텔레 페리코를 타고 해발 4784m의 피친차 산에 오르기로 했다. 천천히 올라가는 텔레 페리코 안에서 키토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나 더 올라갈수록 안개가 더욱 진해져 시내를 볼 수 없게 됐다. 도착하고 나니 정말 고도가 많이 높아졌는지 머리가 띵했다. 고대 자연물 같은 축축한 식물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여행 얘기를 하며 피친차 산 정상을 조금 걸었다. 걷다 보니 몸이 조금 붓는 느낌이 들었다. 고산에서 일생을 지낸 데이비드는 나와 나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솔직히 입술이 조금 파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얘기를 조금 하다가 금방 내려가기로 했다.
텔레 페리코를 타고 내려가니 다시 키토 시내 전경이 보였다. 그와 함께 내 몸속 피도 다시 빠르게 돌기 시작하더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고도가 인체에 주는 영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후 친구들과 늦은 점심으로 에콰도르 음식을 시장에서 사 먹고 일찍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마트에서 그저께 처음 먹어본 피타하야라는 과일과 맥주 한 병을 샀다. 배가 딱히 고프지 않아 피타하야와 맥주만 먹고 자기로 했다. 역시나 피타하야는 달콤했고, 그에 곁들인 에콰도르 맥주 또한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맥주를 마신 후 취기가 빠르게 올라왔다. 물을 좀 맞으면 괜찮아지겠거니 생각하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웬걸 숨이 더 거칠게 쉬어졌다. 안정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물을 마셔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결국 숙소 사장님을 깨워 고산 약을 먹고 바늘로 손가락 열 개를 다 땄다. 손을 다 따고 나니 속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사장님은 여기가 완전 높지는 않아도 고산지대이기는 해서 술 분해가 잘 안될 수 있다고 했다. 맥주 한 잔도 버거울 수 있는 곳이라니 새삼 고산지대에 온 것을 실감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산소의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꼈다. 앞으로 고산이 반 이상인 남미에서의 여행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우선은 술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 위로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여행 312일 차, 2018년 2월 23일
코토팍시 화산에 가기로 한 날이다. 그저께 음주 후 느꼈던 고산 증세 때문인지, 해발 5000이 넘는 코토팍시 산을 오르는 게 꽤나 두려웠다. 심지어 어제 이미 남미 여행의 경험이 있는 지인 형에게 카카오톡으로 나의 걱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형은 괜찮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힘들면 내려오면 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포기를 할까도 했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진짜 포기였다. 그래서 나는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코토팍시행 버스에 탔다. 중간에 내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 해발 4600m의 주차장에 멈췄다. 머리가 띵하긴 했지만 몸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미리 사둔 물과 초콜릿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한 걸음씩 코토팍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행한 형은 산소의 부족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나는 확실히 산소가 부족한 것은 느껴져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걸음을 떼었다. 이 속도로 언제쯤 정상에 오르나 하는 생각이 들 찰나에 문득 'Listen your body' 순례길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내 몸이 받아들이는 데까지가 내 목표지.'
생각이 앞서 나가 먼저 정상에 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조금 오버할 정도로 물을 야금야금 마시며 몸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삼각지붕의 베이스캠프가 나왔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캠프 앞 에콰도르 깃발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이 목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 나도 근처 사람들에게 사진을 요청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표지판에 적혀있는 숫자는 4864m. 내가 알기로 올라갈 곳은 5000m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기다리고 있던 동행 형에게 무어보니 이곳은 중간 대피소고 더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솔직히 속으로 욕이 살짝 나왔지만 지금까지 올라온 것처럼 가면 충분히 갈 것 같아 다시 걸음을 바로 옮기기 시작했다.
페이스를 잃지 않고 신중하게 걷다 보니 멀리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5000m에 가까운 고도는 나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는 했다. 가이드는 힘을 내라며 손짓으로 내게 응원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5100m의 만년설 앞에서 나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이곳에 실제로 오를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이상하게도 웃음이 그냥 나왔다. 풍경이 멋지고 황홀한 것도 있지만 내가 직접 그곳에 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이 더 신이 났다. 나는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어 조금 무리를 해 점프샷을 찍었다. 그리고 바로 하산을 준비했다. 올랐던 것과 달리 내려가는 것은 참 빨랐다. 중력이라는 아까의 적이 친구가 된 기분이랄까.
주차장에서부터는 미리 준비된 자전거를 타고 아래 호수까지 라이딩을 했다. 한 걸음을 집중해 산에 오른 성취감을 중력과 함께 시원하게 타고 내려오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바람에 두통을 날리며 빠르게 높은 고도로부터 탈출했다. 공기라는 것이 참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참 우연 같은 곳에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