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199일 차, 2017년 11월 2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우선 바르셀로나에서 팜플로나라는 마을로 왔다. 오늘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다시 프랑스 생장 삐드뽀흐로 가, 본격적인 순례길에 오를 것이다. 갑자기 순례길을 걸으려는 이유는 여행 6개월 동안 게으름을 충분히 피웠는지, 몸을 쓰고 싶어 져서다. 게으름이 살짝 지루해졌나 보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테마의 여행을 하려니 솔직히 다시 그냥 빈둥대고 싶어 졌다. 귀찮다. 게으름이 가지 말라고 생떼를 부리나 보다. 하지만, 이쯤 여행 스타일을 한 번 바꿔보는 게 좋겠다는 나의 직감이 내린 결정을 믿으며, 게으름을 달래 본다.
비가 내렸는지 온 땅이 젖어 있는 팜플로나는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그리고 처음 들어와 본 성당의 알베르게는 고요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건형이한테 받은 라면을 부엌에서 끓여먹었다. 면발을 호 부니 습기가 안경에 가득 찼다. 라면을 후딱 먹고 순례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밀린 빨래를 해치웠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차디 찬 침대에 조용히 누웠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이곳의 순례자들이 한 명 한 명 알베르게에 들어온다. 어떤 사람들은 빠른 기상을 위해 오자마자 씻고 잠을 청한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모든 곳이 아직은 따뜻하지 않은 이곳. 이곳에서 나는 과연 따뜻함을 찾을 수 있을까? 쌀쌀한 밤이다.
여행 200일 차, 2017년 11월 3일
알베르게 자체 내에서 알람이 크게 울렸다. 춥다. 순간 다시 훈련소에 입대한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아서 그런지 아직 순례길을 걷기도 전에 ‘왜 왔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먼저 앞선다. 하지만 훈련소처럼 일어나자마자 정신없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나는 이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기에 천천히 눈곱을 떼고 오늘의 여정을 미리 살펴본다.
오늘은 카풀 애플리케이션인 블라 블라카를 통해 프랑스 바욘으로 넘어가 생장 삐드뽀흐행 기차를 탈 예정이다. 그전까지 끼니를 때우고 산책을 여유로이 즐기기로 했다. 팜플로나에 오니 바르셀로나에서는 도시 속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려졌던 낙엽들이 눈에 띄었다. 벤치에 앉아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낙엽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의 크기와 비슷하다. 한 여름 바람에 가벼이 나부끼는 소리와는 달리 살을 찌울 대로 찌운 채 꽤나 무겁게 떨어지는 가을의 낙엽 소리. 노랗고도 쌀쌀한 가을 그리고 낙엽이 생각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스페인에 오기 전까지 나는 가을을 잠시 잊고 있었고, 여행 중에 가을의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다. 비행기 한 번으로 도착한 가을, 나도 가을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닌 언젠가 찾아가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 청년의 차를 카풀하여 프랑스 바욘에 도착해서 조금 기다려 기차를 탔다. 어느덧 해의 흔적만이 지평선 멀리 남아 있었다. 영국 락밴드 Keane의 단풍 같은 사운드를 들으며 순례길의 출발점인 생장 삐드뽀흐역에 도착했다. 팜플로나보다 훨씬 시골마을이었다. 나는 곧장 순례자 여권을 받기 위해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할머니 직원분들이 미소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간의 긴장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여권을 받았다. 또한 기부금 2유로를 내고 순례자 조개를 하나 얻었다. 따뜻했던 사무실을 나와 하루를 묵을 알베르게를 찾았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마트와 식당이 닫아 저녁을 먹지 못했지만, 알베르게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프랑스 순례자 친구에게 쌀과자를 얻어 간단히 요기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6인실 침대에 나 혼자 자는 첫날밤. 배가 많이 고프다. 내일은 꼭 고기를 사서 구워 먹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