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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7. 2019

직진 본능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141일 차, 2017년 9월 5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도착했다. 3주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문득 이란에서 어학 공부를 하고 있던 지인 동훈 형이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여행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그때 터키에 있었기에 구글 지도를 켜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의 영토를 살펴보았다. 터키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3국 중 두 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는 나에게 굉장히 생소한 나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갈 일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형의 제안을 수락하고, 바쿠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기존 이미지는 거의 전무했다. 아랍 쪽 국가라고 하기에는 러시아랑 가깝고 그렇다고 유럽이라 하기에는 오른쪽에 이란의 영토가 눈에 밟히는 그 정도의 모호함 정도를 가진 나라였다. 굳이 명확하게 어떤 그룹의 속하는 나라인지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은 미지의 대상 앞에서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배경을 통해 처음 접하는 것을 최대한 친근한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제르바이잔을 내 배경지식만 가지고 친숙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만, 이 나라에 가까운 곳에서 생활을 하는 동행이 있다는 안도감으로 불안함을 애써 지웠다. 


  동훈 형은 나와 같은 중, 고등, 대학교를 나온 1살 많은 형이다.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것은 아니었으나 의도치 않게 연속 동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워낙 똑똑하고 당당한 형이라 만남 전부터 동행으로서 믿음직한 기분이 들었다. 이란에서 버스를 타고 온 형은 저녁 즈음에 숙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782킬로의 거리를 버스로 꼬박 달려온 형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떡지고 얼굴에는 기름기가 가득하고 왠지 모르게 수척해 보이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형은 버스 티켓이 없어서 운전수를 조르고 졸라 출입구 계단에 앉아 17시간을 달려왔다고 했다. 계단에 앉아 17시간이라니, 멀미를 하는 나로선 상상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그저 형에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해프닝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가지고 바쿠의 밤거리로 나왔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는 단언컨대 상상 이상의 도시였다. 기름이 나는 국가라 그런지 도시 자체가 새로 지은 테마파크 같았다. 벤치 디자인부터 가로등까지 새롭게 기획된 예술 도시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전부 세련된 것은 아니었다. 새도시와는 이질감이 드는 조금은 누추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새로운 이 도시에 녹아들지 못 한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 골목골목에서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는 이곳의 아저씨들은 세련을 떠나 굉장히 거칠어 보였다. 그들의 언어를 전혀 모르기에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골목에 거칠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있을 때면 괜히 시비 붙을까 봐 고개를 멀리 두고는 했다.


  하지만, 여행자라는 신분은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 대한 정보의 결핍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때도 나는 보통 우악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을 피해 최대한 순해 보이는 사람들을 찾곤 했다. 그런데, 형은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가서 질문을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지, 왜 굳이 저렇게 험상궂은 아저씨들에게 묻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형의 그런 온화한 직진에 대개의 아저씨들은 숨겨놓았던 미소를 보이며 길을 알려주고 심지어는 하이파이브를 형과 하기도 했다. 많은 아재들이 그렇듯 자신의 도시에 대해 물어보는 것에 오히려 반기며 말해주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놀라웠다.


  물론 형이 근처 나라인 이란어를 할 줄 알아 말이 아주 조금은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던지고 또 아는 단어들을 주워 들어가며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고, 그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형은 마치 편견이 없는 사람처럼 그들에게 직진했다. 그러한 그의 직진을 목격할 때마다 나의 부정적 예측들은 쉬이 무너져 내렸다.



  여행 143일 차, 2017년 9월 7일

  바쿠에서의 3일을 마치고 미니밴을 타고 셰키라는 작은 시골 마을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둘 다 심카드를 사지 않았기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오기 전 미리 예약한 숙소의 위치를 캡처했다. 그렇게 우리는 터미널로 갔고, 작은 회색 봉고차를 탄 후 셰키로 출발했다. 해가 막 넘어가 눈에 보이는 해는 없이 밝기 만한 저녁이었다. 차가 좁아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음악에 기대 겨우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렇게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움으로 번져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도착을 했나 싶어서 앞을 보니 뜬금없이 길 위에 큰 나무들이 몇 그루 쓰러져 있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마침 셰키에 폭풍우가 막 지나갔다고 했다. 조금 더 일찍 출발해서 그 폭풍우를 직접 맞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어지러워진 길을 피해 다니느라 예상 도착 시간을 훌쩍 넘긴 것은 조금 걱정될만한 일이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밤 우리는 미리 찍어둔 지도만을 가지고 숙소를 찾으러 나섰다. 시골이라 그런지 불도 필요한 만큼만 켜져 있었고,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숙소를 에어비엔비로 예약해서 간판 따위는 전혀 없는 일반 가정집을 찾아야 했다. 오랜 이동으로 이미 지친 상태였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집을 찾기에 위해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지도를 보고 금방 찾겠거니 싶어서 간혹 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그냥 떠나보냈다. 또한 이 어둠 속에서 괜히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알아서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골목이 복잡해 대략의 위치는 알아도 입구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다. 결국 형은 다시 그답게 사람이 지나칠 때마다 그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간사하지만, 나는 형을 보호막 삼아 그들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몇 명의 도움을 거쳐서야 집의 입구를 찾아내었다. 어둠 속에서 그 집의 입구를 우리 스스로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다짜고짜 모든 집에 초인종을 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마당으로 들어서니 우리의 인기척을 들은 젊은 부부가 방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오랜 이동 끝에 잠시간 내 방이 될 공간을 맞이하는 일은 언제나 참 다행인 순간이다. 게다가 그 집주인의 환대까지 있다면 길 위에서 받은 많은 스트레스 또한 잠시 동안 눈 녹 듯 사라진다. 젊은 부부는 우리가 배고파 보였는지 늦은 시간임에도 오믈렛과 빵, 요구르트, 호두 잼 등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실제로 이동하느라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우리는 감탄에 감탄을 하며 내어준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밤하늘이 보였다. 고생 끝에 온 선물 같은 저녁식사였다. 



   여행 145일 차 , 2017년 9월 9일

  오늘은 동훈 형의 직진 본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3일간의 셰키에서의 평화로운 체류를 마치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여전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고 있을 즈음, 차 한 대가 옆에 멈추었다. 한 현지 젊은 청년이었는데, 어디로 가냐고 묻더니 자기가 터미널로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타라고 했다. 의심은 되었지만 너무 더웠기에 우리는 그의 차에 탔고, 편히 터미널에 내렸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나쁜 사람을 만나는 만큼, 생각지도 못하게 착하고 베푸는 것에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쁜 상황을 마주했다고 계속 긴장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만큼 좋은 상황도 금방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였을까? 그날 낮에 얻은 여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바로 긴장을 할 상황이 생겨버렸다.


  우리는 터미널에 내려 기분 좋게 트빌리시행 티켓을 창구에 물었다. 하지만, 창구 직원은 트빌리시행 버스는 아침 일찍에만 있다고 말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당황스러웠다. 우리의 심경을 눈치챈 택시기사만이 택시로 트빌리시에 가자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 대었다. 나는 긴장을 살짝 풀고 조금은 당연하게 트빌리시에는 내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형을 보니, 그의 눈에서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모습이 비쳤다. 형의 머릿속에는 이미 트빌리시가 가득 차 있는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약간 당황했지만, 설마 그런 방법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은 아제르바이잔 국경 근처인 발라칸으로 가는 벤을 타고 가서 국경을 넘고, 다시 거기서 택시를 타거나 히치하이킹을 해서 트빌리시에 가는 것이었다. 형은 그렇게 조지아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꾸역꾸역 국경을 넘어본 적은 없었다. 유럽 국가 간이 아닌 이상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멀미도 조금 있는 편이라 걱정되었고, 굳이 그렇게 까지 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형은 이미 확신으로 차있었다. 결국 우리는 발라칸 행 벤 티켓을 샀다. 짐을 트렁크에 넣고 좌석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오래된 벤의 좌석은 꽤나 딱딱했다. 출발을 기다리며 앉아 있으니 하나, 둘 다른 손님들도 타기 시작했다. 한 명의 외국인 여행객과 우리를 제외하면, 전부 현지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능숙하게 짐을 싣고, 익숙하게 빈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차는 만원이 되었다. 드디어 벤이 출발했고, 마음 편히 눈을 붙이면 발라칸까지는 무난하게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했다.


  하지만, 이곳의 교통수단의 개념은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목적지가 발라칸이라고 해서 그곳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정류장이 없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발라칸을 향하는 벤은 그 길에 사람이 있으면 멈추어서 사람을 태웠다. 좌석이 없어도 서 있을 공간이 있으면 태웠고, 하차 버튼이 없어도 운전수에게 말을 하면 원하는 곳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내 앞에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막막했다. 그리고 이게 단지 오늘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 더욱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를 멈추기를 반복하여, 겨우 겨우 발라칸에 도착했다. 


  발라칸에서 국경에 가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곳 사람들은 러시아어를 쓴다는 것이었다. 바쿠는 그나마 이란이랑 가까워 동훈 형도 몇 단어들을 캐치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우선 형은 택시비도 아낄 겸 벤에서 몇 마디를 나눈 미국인 여행객 안드레와 함께 가자고 했다. 나 또한 타지에서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에서도 2년 정도 산 경험이 있어서 러시아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우리는 시장에서 일용할 양식을 사고, 가격을 흥정해 택시를 탔다. 물론 흥정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안드레의 몫이었다. 아마, 나와 형만 있었으면 택시 기사가 부르는 게 값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출입국 사무소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우리는 실내로 들어가 차분하게 출국 도장을 받았다. 그리고 당당히 국경을 건너 조지아로 들어가는 입국도장 또한 무탈하게 받아내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우리는 여정의 반을 온 것이었다. 직진 본능의 동훈 형은 이번에는 히치하이킹으로 트빌리시로 가자고 했다. 이미 꽤 지친 나와 달리 형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험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을 보며 나는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즐기기보다는 불안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국경을 지나다니는 차는 많지 않았다. 오직 한 명의 택시기사만이 우리 주위를 얼쩡거리며 흥정을 하려 했다. 


  지나가는 차가 너무 없어, 형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택시 기사와 가격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개인당 20라리 (한화 약 9000원)으로 합의를 보려는 순간이었다. 길 옆에 세워져 있던 화물차의 주인이 차에 오르려 했다. 그러자 형은 자신의 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달리는 치타처럼 지금의 협상 테이블을 엎고 빠르게 화물차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빠르게 히치하이킹 협상을 시작했다. 물론 바로 거절을 당하였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겁도 먹지 않는 형의 직진 본능에 제대로 놀랐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택시기사에게 돌아가, 머쓱한 웃음과 함께 차에 타 트빌리시로 향했다. 


  산과 산 사이에 찬란한 불빛들을 수놓고 있는 트빌리시의 야경은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시내 한가운데에 내렸고, 앤드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미리 예약한 에어비엔비 숙소로 갔다. 벤을 타고 택시를 타고 다시 택시를 타고 마지막으로 전철을 탄 한나절의 끝에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사진으로 미리 보았던 접이식 침대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역에서 내려 미리 저장해놓은 지도 사진을 보고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많은 주택가들이 나타났다. 그랬다.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수도, 즉 도시였다. 셰키에서의 집을 생각하고 지도의 위치만 찍어놨던 우리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 속에 들어서면서 말을 잃었다. 우리는 집의 위치만 알지 이 집이 몇 동, 몇 층인지 알지 못했다. 호스트의 전화번호는 있었지만 심카드가 없어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빨리 다시 시내로 나가 심카드를 사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였다. 형은 심카드의 심자는커녕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찾았다. 전화번호가 있으니 휴대폰을 빌리면 된다고 했다. 심플한 해답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파트 단지에서 저녁 공기를 쐬는 한 가족들 무리로 가 휴대폰을 빌려 호스트에게 전화를 했다. 호스트는 우리를 마중 나왔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겨우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직접 부딪히는 일이 껄끄러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어쩌면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낀 순간 말이다. 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행자라면 타지에서 약자이기에 최대한 단점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처럼 그 단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도움을 구하면,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보다 도와주려는 사람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아 보였다. 물론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번거롭고 피곤하기도 하다. 그리고 최대한 껄끄럽지 않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지혜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불완전한 존재고, 그렇기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언제든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내지 못할 때가 오더라도,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이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움으로 새로운 길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앞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어야겠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모르는 것은 좀 걱정할 법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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