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작년 에디톨로지에 대한 김익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유시민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가라고 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만을 담아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지식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깔끔하게 편집하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글을 쓸 수 있다. 이것이 에디톨로지다. 20대에 세계사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시민 작가의 글이 그 좋은 예다. 이번에 『청춘의 독서』로 드디어 만났다. 내가 꼭 직접 읽지 않아도 누군가가 관점을 갖고 책을 소개해주고 해설해 주고 일부를 인용해서 전해주는 것, 책을 소개해주는 책,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밀리의 서재로 듣고 있다.
어제저녁 설거지를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슬렁슬렁 듣다가, 맬서스의 인구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설거지를 잠시 멈추게 되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겉보기에 가치중립적인 문장 뒤에 녹아있는 맬서스의 냉정한 세계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원문으로 접하니 충격적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립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빈민 구제에 반대했다. 심지어 빈민들이 전염병에 걸리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런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서는, 사망률을 낮추는 일이나 자연의 작용을 저지하려는 어리석고 헛된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촉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 만일 끔찍한 기근이 너무나 자주 찾아오는 것을 피하려면 모름지기 다른 형태의 자연적 파괴 작용을 적극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청결한 생활이 아니라 불결한 습관을 권하는 편이 좋다. 도시의 골목을 더 좁히는 한편, 많은 수의 인간을 좁은 가옥에 군집시킴으로써 페스트가 다시 찾아들도록 해야 한다. 또 시골에서는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 근처에 마을을 세워 비위생적인 축축한 땅에다 집을 짓고 살도록 권유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혹독한 전염병에 대한 특수 요법을 배척하는 한편, 특별한 질병의 근절법을 고안함으로써 인류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비롭기는 하지만 생각이 아주 잘못된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 『인구론 하』, 168~169쪽 - <청춘의 독서>, 유시민 - 밀리의 서재
독립심이 없이 남에게 의지하려는 빈민을 언제까지나 치욕적인 상태 그대로 버려두는 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잔인해 보이지만, 그와 같은 자극은 인류 대부분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자극을 약화시키는 모든 것은, 비록 그 의도가 아무리 자애롭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 목적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구론 하』, 289~290쪽 - <청춘의 독서>, 유시민 - 밀리의 서재
식량증산에 성공한 지금이야 맬서스가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맬서스의 직관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다고 해서, 한 번 들었을 때 맞는 말 같다고 해서 곧바로 수용해 버리는 것이 위험할 수 있구나, 다른 한편 내가 금과옥조처럼 믿고 있는 신념이라도 그게 맞는지 다시 한번 의심해봐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다. 유시민 작가의 감상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도국의 빈곤퇴치를 위한 원조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00~2010년대 나온 관련 책을 몇 권(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위대한 탈출, 죽은 원조) 읽어 보니 대체로 원조는 효과가 없다고 한다. 원조가 오히려 개발도상국의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가령 개도국 정부의 부정부패를 심화시킴으로써-주장도 있다.
맬서스와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하고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조가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개도국 빈곤퇴치를 위한 외부의 지원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맬서스 책 원문을 본 지금 더 그렇다. 유시민 작가 때문에 얼렁뚱땅 지금 시점에서의 생각을 거칠게나마 글로 써보게 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개도국 빈곤퇴치는 애초에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 아니었을까?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하는데, 부익부빈익빈을 촉진하는 세계 경제 구조는 그대로 두고 원조자금으로 특정국가의 빈곤층을 줄이겠다는 것이 실현 가능한 과제였을까? 다 함께 눈 가리고 아웅한 것은 아닌가?
<거대한 역설>을 읽고 빈곤이 국가 단위가 아닌 글로벌 차원 계층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번쩍번쩍하는 이집트의 쇼핑몰에 가서, 이 나라가 왜 아직 원조를 받는지 어리둥절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빈곤감소를 논하는 것이 이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별 국가단위 협력보다는 기후변화나 전쟁, 재난, 재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과 같은 주제 중심으로 국제협력 재원을 개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리뭉실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