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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JI Aug 05. 2024

넘어야 할 관문

무사히 비행기 타기


남편에게는 여권을 잃어버리는 징크스가 있다. 내가 아는 것만 네 번이다. 첫 해외 출국에서 여권을 집에 놓고 나가 그의 누나가 욕을 하며 여권을 공항에 가져다 주었다고 들었다. 루앙프라방 여행에서 여권이 들어있는 재킷을 숙소 옷장에 고이 모셔두고 나왔다가 다시 뚝뚝을 타고 숙소로 황급히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남편은 물론이고) 나도 비행기를 놓친 적이 있다. 늦잠을 잤고 차가 막혔고 공항버스가 인천으로 바로 내달리지 않고 김포공항을 들리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포기했다.


이번엔 밤 10시 비행기다.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여권은 잘 챙겨두었고 8시까지 도착하면 되니 7시에 집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4시가 넘었을 때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남편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밥을 걸렀다. 그런데 약속한 7시가 되었을 때 남편은 하얘진 얼굴로 배가 고프다며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획보다 30분 늦게 출발했다. 공항이 집에서 워낙 가까우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공항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초에 공항을 이용했을 땐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우리만 휴가를 떠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에어 프랑스와 KLM이 함께 쓰는 단 두 개의 카운터 앞에서 구불구불 기나긴 줄은 짧아질 기미가 없었다. 심심해 1호는 비행기를 못 탈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괜찮아. 비행기 탈 수 있어. 그리고 만약 못 타면 다음 비행기가 있어. 걱정하지 마.” 

이렇게 1호를 달랬지만 마음속으로는 낭패를 불렀다. 


그때 남편이 온라인 셀프 체크인을 권했다. 그런 것이 있구나. 처음 해보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의 터치와 여권 스캔 끝에 좌석 지정까지 무사통과했다. 이제 안심이다. 우리는 짐을 부치고 보딩 패스도 받았다.

‘이것 봐,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불안할 필요 없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검색대를 통과했다.


기다림과 불편함을 견디기


바쁜 하루를 보낸 데다가 비행기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영향으로 심신이 피곤했다. 이제 할 일은 기다림뿐이다. 탑승 시각이 되기를 기다리고, 사람들이 비행기에 타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자리에 앉아서는 이륙을 기다렸다. 비행기는 만석이고 나는 익숙한 이코노미석이다. 다리 쭉 뻗고 눕고 싶다. 20년 전에는 비행기 타면 뜨거운 물수건을 줬는데, 지금은 공장에서 찍어낸 향내 나는 물티슈를 준다. 곧이어 승무원들이 통로를 걸으며 칙~ 방향제를 뿌린다. 인공적인 향기를 머금은 액체 방울이 목에 걸려 모래처럼 까끌까끌 거린다. 춥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 새벽 5시에 잠이 부족한 형제를 이끌고 비행기를 갈아탈 생각을 하니 더욱 그렇다.


심심해 형제는 신이 났다. 비행기를 실물로 봐서 신이 나고, 비행기가 뜨는 것이 신기해서 신이 나고, 좌석의 이런저런 장치를 만지면서 또 신이 났다. 집에서는 시간제한에 걸려 보지 못하는 동영상을 실컷 봤다. 8살이 되도록 닌텐도를 사주지 않는 부모를 둔 심심해 1호는 골프부터 배틀 십, 보석 맞추기 등 각종 게임을 섭렵했다. 그래, 너희들이 좋으면 나는 불편해도 괜찮아… 형제가 몇 시간을 잤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먼저 잠들었으니까.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연결 편 탑승을 기다리던 남편은 속마음을 입 밖에 내버렸다. 

“집에 가고 싶다.”

우리와 달리 형제는 점점 더 신이 나는 듯했다. 특히 낮 비행기 탑승은 그들에게 세상 신나는 이벤트였다. 서로 창가에 앉겠다고 아우성이었다. 하긴 그 나이에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에 흥분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신이 난 1호의 발길질 때문에 나는 앞 좌석 승객에게 고개 숙여 사죄해야 했다. 그래도 근처에 우리 아이들보다 활기찬 3남매를 둔 가족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았다. 곧 우리는 제네바에 도착했다.


한국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한다고요?


여기 사람들은 제네바를 '주네브'라 발음하는구나 생각하며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기 위해 공항에 있는 AVIS를 찾았다. 창구에 남편의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을 냈다. 이번 여행 준비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것이 단연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을 꼼꼼히 챙긴 일이건만 창구 직원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국내에서 발급받으신 운전면허증도 주세요.” 

“없는데요?” 

“그럼 진행이 어렵습니다.” 

옆에 있던 선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은 국내 운전면허증이 있다는 일종의 번역 서류에 불과해. 국내 운전면허증을 꼭 챙겨 와야 해. 요즘은 국영문이 병기된 면허증이 발급되기도 하지만.”


머릿속이 진공 상태가 되었다. 사리분별을 곧잘 하는 심심해 1호가 이 사실을 알면 우리 부부를 향후 십 년 간 공격할 것이다. 늘 나보다 침착한 남편, 잠시 생각하더니 가방을 뒤져 내 한국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귓속말을 덧붙였다. 

“이건 가져오지 말려다가 가져온 건데…” 

(근데 왜 가져온 거야? 참 잘했다!)


그래서 내 명의로 렌터카를 빌리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지난 1년간 운전대를 잡지 않았지만 여행 중에 하루라도 내가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견적에 수정을 주었다. 수동 기어를 오토로 바꾸고, 보험도 기본형에서 전체 보장형으로 바꾸었다. 고심해서 저렴한 견적을 만들어 놓고는 홀린 듯이 현장에서 약 500 스위스 프랑을 추가 결제한 사건의 전말이다.


주차장에 가니 흰색 현대 투싼 하이브리드가 서있었다. 심심해 형제가 만세를 불렀다. 

“우아! 멋있는 차다!” 

보험을 괜히 비싼 걸로 바꾸었다고 후회하던 마음을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그래 너희들이 좋으면 됐다. 이제 어려운 절차는 다 끝났으니, 여행 내내 꽃길만 걷겠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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