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머리 아파요. 열나는 것 같아요."
"그래? 체온계로 제보자. 잉? 36.4도인데?"
"그래도 아파요."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힘들면 잠깐 엎드려 있어 보자."
현우가 계속 칭얼댄다. 머리가 아파서 리코더도 못 불겠다고 하고, 급식실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우긴다. 손가락이랑 다리까지 아픈 거니... 체온도 정상인데 나보고 어떡하라는 걸까. 짜증이 훅 올라온다. 화는 내고 싶지 않아서 나 들으라는 듯이 계속 구시렁대는 현우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현우가 더하지 않아도 이미 반에 난리가 난 상태였다. 미술 시간에 처음 수채화를 배우는 날이었다. 물감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라 누구는 물통을 통째로 쏟고 누구는 작품이 맘에 안 든다고 도화지를 찢어버렸다. 물통을 쏟은 아이에겐 신문지를 가득 뭉쳐서 건네주었고 도화지를 찢어버린 아이에겐 어쩌다 그랬는지 상세히 묻고 들은 후에 새 도화지를 건네주었다.
그 와중에 몇몇 여자 친구들 사이에 심한 험담을 하며 편 가르기를 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수업을 멈추고 집단 상담을 하느라 미술 시간의 난리 통은 별일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그래, 물 흘린 건 치우면 되고 도화지는 새로 주면 되는 거였다.
하교 후에 관련된 학생들의 학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려야 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한 학부모가 '내가 전해 들은 것과 다르다, 너무 우리 딸만 잘못한 것처럼 된 것 같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여자애들끼리 친하게 지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걸 꼭 사과까지 해야 하냐.'라는 말도 들었다. 마침 손님이 찾아와서 전화가 중단되었기에 망정이었다. 다시 전화하고 싶지 않았고, 쪽지로만 의사를 무미 건조하게 전달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울렁거려서 당장 여름 방학이나 했으면 싶었다.
정시 퇴근 시간을 훌쩍 넘어 집에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배달 마라탕 생각이 났다. 건더기 팍팍 추가해서 얼큰하게 한 사발 들이킬까? 찹쌀탕수육을 세트로 시켜서 아무 유튜브나 보면서 다 밀어 넣고 나면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고 있겠지. 그러고 나서는 편의점으로 홀린 듯이 걸어가 크림빵과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서 쑤셔 넣겠지. 안 봐도 뻔한 짜증가득한 날의 저녁 코스였다.
그 순간은 잠깐 행복하겠지만 그다음 날 일어나 더부룩한 아랫배만큼이나 마음에도 찝찝함이 남겠지. 과식의 시작이 스트레스였으니 말이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 본 일이었다. 당기는 대로 다 먹고 좁은 방의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이나 만지작 거리며 저녁 시간을 순삭 시키는 게 최선이 아닐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종일 수고한 내게 더 나은 대접을 해주고 싶었다.
일단 잠깐 멈춰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보지 않고 삼십 분 정도 몸을 눕혔다가 일어났다. 머릿속에 오늘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나눈 대화들이 둥둥 떠다녀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은 피티 운동을 가는 날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이제 와서 트레이너 선생님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께 오늘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르면 살살해주실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힘들게 근육을 조이다 보니 땀이 뻘뻘 나고 잡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운동이 끝났을 땐 확실히 기분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헬스장에서 부들부들 거리는 다리를 끌고 나와 마라탕 대신에 먹고 싶은 게 있을까 싶어 먹자골목 쪽을 서성였다. 못 보던 수제 만두 집이 눈에 띄었다. 검색해 보니 꽤 맛집인 것 같길래 고기만두 한 판을 시켰다. 포장해서 먹을까 했는데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주는 겉절이가 탐스러워 보여서 먹고 가기로 했다. 방금 찐만두는 촉촉하고 담백해서 딱 내 스타일이었다. 겉절이와 궁합이 좋아 금세 서너 개를 먹어치웠다. 내가 사장님이라면 콩국수 대신 비빔국수를 같이 팔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커플이나 가족끼리 와서 만두전골에 칼국수를 넣어 먹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이 나뿐이라 한 번씩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포장했으면 이 아삭한 겉절이를 놓치지 않았겠는가. 꽤 씩씩한 어른이 된 것 같아서 혼자 뿌듯했다. 입을 더 크게 벌려 남은 만두를 씩씩하게 씹어 먹었다. 그런데 겉절이를 워낙 많이 주셔서 열심히 먹었는데도 일부가 남았다. 태어나자 버려지는 겉절이를 두고 식당을 나오려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랏? 그러고 보니 내 신경이 학교 일 대신 겉절이로 옮겨가 있었다. 피곤한 몸이라도 나를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주변 공원도 가볍게 한 바퀴 걷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집에 가서 비빔국수 대신 비빔면을 끓여 먹은 건 안 비밀이다. 푸하하! 과연 이게 배달 마라탕을 시켜 먹는 것보다 질 좋은 저녁 식사가 맞는 걸까. 그래도 스트레스 상황에서 폭식을 반복하던 습관을 바꾸려고 시도해 본 게 어딘가 싶다. 오늘 같은 스트레스 종합 선물세트의 상황이 당분간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혹시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할지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날이 오면 오늘 갔던 만둣집 옆에 눈여겨본 생선구이 집에 나를 데려다줄 거다. 만두집에서 나올 때 보니 생선구이 집에 웨이팅이 꽤 있었다. 숯불에 굽는 고등어구이의 껍질에 윤기가 좔좔 흘렀다. 이만 원짜리 모둠 생선구이를 시켜서 혼자 야무지게 발라 먹고 사이드로 나오는 된장찌개도 밥에 비벼먹어야지. 흐흐. 그땐 어느 생선부터 발라 먹을지, 꼬리부터 먹을지 몸통부터 먹을지 고민하느라 학교에서의 일은 잠시 잊게 되지 않을까? 아주 조금씩, 미약하게나마 마라탕을 대신해 나를 위로해주는 법을 마련해 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