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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Jul 14. 2024

똑같이 사랑하는 척

"일회용 숟가락은 비닐 뜯어서 사용하세요. 비닐은 쉬는 시간에 꼭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비닐 안 뜯고 쓰는 사람도 있어요? 당연히 비닐은 뜯어야 되는 거 아닌가?"

  순간 '또' 현우한테 욱할 뻔했다. 다행히 꾹 참았다. 참았다기보단 못 들은 척했다. 입을 열면 험한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현우가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말을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지난주와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주 체육 시간이었다. 팀 게임을 했는데 잠시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서로 잘못을 탓하면 싸우는 일이 생겼다.

  "야, 지금 나 말하고 있잖아. 넌 입 다물어!"

  현우였다. 보통 현우가 친구들 말하는 도중에 끼어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반대로 누군가 자기가 말할 때 끼어드니까 열이 난 모양이었다.

  "정현우,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네가 뭔데 친구한테 입을 다물래. 내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나도 그런 말 안 하는데 네가 그래? 네가 선생님이야?"

나는 이성을 놓고 말았다. 내가 선생님이 되어 학생 앞에서 내 본 소리 중에 가장 크고 날선 소리였다.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눈빛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운동장이었고, 6교시라서 아이들을 미리 데리러 온 학부모님들도 멀찌감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잘못 걸리면 아동학대로 신고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한 번 폭발한 분노의 화산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현우의 공격적인 말투에 대해 좋은 말로 타일러보려던 시도는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평소에 교실에서 큰 소리를 내는 편이 아니어서 그날 내 모습을 직관한 반 아이들은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제 발 저린 나는 반성과 성찰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나는 현우의 말이 왜 그렇게 거슬렸을까, 그 아이는 집에서도 이런 모습을 아실까, 현우의 강압적인 말투를 반대로 나도 똑같이 한 것 아닐까, 선생님도 화나면 무섭다는 걸 한 번 보여주는 기회가 된 걸까.

  한 사람으로서 나는 충분히 많이 참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교사로서 그게 훈육을 위한 최선이 맞았을까에 대한 확신이 않았다. 나는 결국 다음 날 아침 조회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현우에게 어제 큰 소리를 낸 것에 대해 사과했다. 친구들 앞에서 너에게 소리 지른 것 미안하다고.

  우려와 다르게 현우에게 그 일의 영향력은 크지 않은 듯 보였다. 1교시 쉬는 시간부터 다시 친구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녔다. 이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싶었지만 어쨌든 나는 사과를 했고 내 맘이 좀 편해졌으니 되었다. 허탈하기도 했지만 배운 것도 있었다. 큰 소리 내지 말아야지. 그게 도움이 되지도 않고 나만 찝찝하다는 걸 다시 한번 알았다.

  "너 실은 친구들이랑 친해지고 싶잖아. 그래서 여기저기 도와줄 곳 있나 살피고 다니는 것 맞지? 그런데 현우야. 친구들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거랑, 뭘 잘 해주는 거랑 뭐가 더 먼저일까?"

 "네가 습관처럼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려고 할 땐 내가 사인을 줄게. 우리만 아는 사인이야. 현우가 알아채고 멈춰보는 거야. 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꾸 혼나는 모습 보이지 말자. 해볼 수 있겠어?"

 변명을 해보자면 이런 교과서 같은 말들로 현우를 타일러 보려는 시도를 한 학기 동안 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도록 하고, 너는 더 예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응원도 해보고, 예쁜 말도 따라서 말해보았다. 내 딴에 할 수 있는 훈육은 다 해보았다. 잠깐 나아지는가 싶어서 기대를 하다가도 하루 이틀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와버렸다. 1학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 뭐가 나아진 게 있나 싶어 힘이 빠진다. 바꾸려는 게 욕심인가 싶다가도 다른 친구들에게 자꾸 피해를 주니 가만둘 수도 없다.

  그렇게 요즘은 현우와 아이들 사이에 생기는 갈등을 어설프게 풀어가며 지내고 있다. 자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친구는 시무룩해서 책상에 엎드려있는데 현우는 수학시험 백 점 맞은 걸 신나게 자랑하고 다닌다. 나는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 아이의 말에 점점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 현우도 다 느끼고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다 아니까. 근데 난 이제 슬슬 지쳐간다. 거리를 둔다. 인간관계에서 무관심과 포기가 가장 차갑다는 걸 현우는 알까.

  

  내일 출근하면 나는 또 우리 반이라는 꽃밭에 공평하게 물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쑥쑥 자라는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 물뿌리개가 꽃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비슷하도록 초를 세어도 보겠지. 아이들이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잡초도 뽑아주고 필요한 아이에겐 영양제도 꽂아주겠지.


  겉으로는 성실한 꽃밭의 관리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물뿌리개가 현우 꽃 위에 머무를 땐 '쑥쑥 자라라~ 물 맛있게 먹어!'라고 진심으로 속삭이지는 못할 것 같다. '에잇 그래, 너도 많이 먹어라! 이 똥강아지야!' 이런 마음만 되어도 다행일 것이다.

  나중에 연차가 쌓이고 경험도 많아지면 이해심이 넓어져서 나을까?  현우 같은 아이도 똑같이 예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그렇게 되려면 아직 먼 것 같다. 지금 나는 너를 똑같이 사랑하는 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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