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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use Oct 11. 2023

134340 Pluto

막상 명왕성은 아무렇지 않아요

퇴근하고 육신이 피곤하여 집안살림을 잘 보살피지 못했더니 그새 집안꼴이 엉망이 됐다. 밀린 빨래 돌리랴, 화장실 청소하랴, 창틀먼지 닦으랴, 오늘 밤은 그야말로 대청소의 날이었다.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던 수경식물의 물도 갈아주었다. 주기가 좀 지난 상태에서 물을 갈아주었는데도 이놈의 생명력은 멀쩡하다. 잠깐의 관심이라도 끊어지면 투정 부리는 인간과는 다르게 너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도 스스로 묵묵히 잘 자라주고 있구나.




명왕성 입장은 몰라도 돼.. 그냥 우리가 서운하다고


최근에 유튜브로 알쓸인잡을 챙겨보았는데 그중 명왕성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에서 엔딩을 담당하고 있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이다. 행성으로 갖춰지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고, 일정한 궤도를 갖고 있지 않아서 결국 쫓겨났다고 하는데 만약 이 명왕성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차후 발견된 행성들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생겨서 왜소행성으로 강등시킨 것이다.


그런 명왕성의 스토리를 듣고 슬퍼하는 문과형 작가와 아무 감흥 없는 이과형 과학자들의 첨예한 대립이 매우 재밌었다. 나도 김영하 작가님처럼 서운함에 ‘과학자들 너무해’를 외쳤지만 사실 심채경 박사님의 말처럼 태양계의 행성에서 퇴출돼도 명왕성은 아무렇지 않다. 그저 서운해하고 감정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서운함’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서운한 감정을 꽤나 자주 느끼는 사람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상대방이 겨우 그거밖에 행동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섭섭함에 투정을 부렸을 때 받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등 그냥 서운덩어리이다. 나로서는 애정이 있는 만큼 서운한 것이니 내 입장을 이해해주겠거니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이런 내 모습에 질려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소수 겪게 되니 내 자신이 참 초라해지는 것이었다. 그 서운함의 크기도 너를 위한 내 마음의 크기였는데, 결국 넌 내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구나.


그래서 조금은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감정에 크게 질척거리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사람. 하지만 아직도 감정은 쉽게 요동치고 갈길은 멀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짙은 감정을 걷어내고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문장들을 접하지만 아직도 나는 내 감정 하나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을 뿐이다.


134340 이라는 차가운 일련번호를 부여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명왕성처럼, 인간이 손길을 내어주지 않아도 떼쓰지 않고 스스로 잘 자라는 수경식물처럼 나도 감정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 덤덤한 생물이고 싶다. 그래서 좋은 일에도 들뜨지 않고 나쁜 일에도 초연할 수 있는 바다같이 깊고 고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수경재배식물, 버킨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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