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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Jul 13. 2021

글쓰기의 쓸모

쓸모쯤 없더라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나는 자주 여러번 읽는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일 때도 있고, 너무 좋아 내 몸에 새기고 싶어서 일 때도 있고, 상상하는 것이 즐거워 그 기쁨을 계속 누리고 싶기 때문에도 자꾸만 읽는다. 부족한 읽기 능력과 이해력 때문에 같은 글을 읽는 데도 남들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렸던 건 '언어' 문제집을 풀던 수험생 부터였다. 그 때는 틀린 답을 골라놓고도 '문학에 답이 어딨어! 내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는데!' 라며 되도않는 오기를 부리곤 정답에 가까워지길 그만두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못하는 걸 하고 싶어하지 않은 법이라 나도 읽기를 그만두고 싶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TV 보기를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득바득 읽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TV가 보여주는 낯선 세계보다 글이 인도하는 무한의 세계가 더 멋지게 다가왔다. 정답을 골라내야만 했던 벨트 버클이 풀리고나니 그 세계는 나를 놀라운 자유로 인도했고, 더 큰 힘으로 나의 현실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부터였다.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몰두한 것이. 어떤 때는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 놓기만 해도 내가 한층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판타지 같은 엑스터시마저 부족했는지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느낌을 위해 ‘받아 적기’를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꽂아두고, 읽고, 때때로 받아 적다보니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마음이라고 해석하는 ‘Mind’를 가리킬 때 심장을 떠올리곤 하지만 서양권에서는 뇌가 있는 머리를 가리킨다.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그 마음이 내 심장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 단언할 순 없지만 분명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내 마음 어딘가에 알을 낳고 부화한 것이다. 

 장기하는 자신의 노래로 위로받았다는 말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의 노래는 고작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수단일 뿐이었는데, 겸연쩍게도 누군가를 위로하게 된 것이다. 내 글이 그렇다. 내 안에서 부화한 ‘쓰기 욕망’은 토로하는 나를, 분해된 나를 광장에 세운다. 한참동안이나 세워놓는다. 수치심과 고통, 후회와 절망을 반복하다보면 조각난 내가 어떤 모양인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차분한 상태에 이른다. 바로 그 때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글쓰기가 나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미처 회복까지 가지 않더라도 손이 멈추는 시점엔 언제나 홀가분해진다. 전보다 조금 더 유연한 상태가 된다. 나는 이렇게 위로받고 있는데, 과연 나의 글도 장기하의 노래처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날도 있긴한걸까? 근데 뭐, 그의 책 제목처럼 누군가를 위로하지 못하더라고 


상관없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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