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3개월을 정리하며
돌연 바리스타
바리스타로 일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애당초 바리스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커피를 좋아했고 커피 파는 공간은 더 좋아했다. 뭐가됐든 배워 놓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과 용돈 벌이를 해야했던 현실이 더해져 지원서를 넣게 된 것 뿐. 그 우연에 운이 더해져 바리스타라는 미지의 세계로의 입장권을 얻게 된 것이다.
벌써 4년도 넘은 시작의 설렘과 긴장은 어느새 가물가물해졌다. 돌연 사람들에게 음식을 파는 일이 직업이 된 사람. 첫 출근날 손님께 드릴 빵을 한데 담는 비닐봉투가 손가락 사이에서 자꾸만 미끄러지길래 그저 관성대로, 검지 손가락을 혀 끝에 살짝 갖다대고 마찰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었다. 나를 전담 마크하던 선임은 김고은을 닮은 (어디까지나 매력적으로) 찢어진 눈을 한 언니였는데 (나중에는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된) 그 고양이 같은 눈이 1.5배 씩이나 커지더니 날 보며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그 표정과 말투에는 '야단에도 정도가 있지' 하는 기막힘이 가득했다.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 지 가늠도 안 될만큼 '몰상식'했던 나는 음식을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한 채 바(bar)라는 무대에 올랐다.
체력전이면서 동시에 심리전인
나는 아주 아주 바쁜 매장에서 일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빴다. 정말로 바빴다. 일을 시작한지 3일 만에 고민이 시작됐다.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귀가하기도 여러 날. 이 일이 내 삶에 괴로움과 외로움은 가져다줄 지언정 이로움에 있어서는 요원해 보였다. 바리스타는 순전히 체력전이었다. 그런데 체력전을 시작하기 전 심리전이 먼저 훅 치고 들어온다. 살며시 그러나 순식간에 들어온 탓에 내 중심부 아주 가까이에 똬리를 틀고 난 후에야 그 인기척에 놀라고만다. 이 심리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그 만인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나 자신'이 가장 비열하고 치밀하고 지독한 강적이다. 나는 분명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와 각종 청소를 할 뿐인데 뿌리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케케묵은 감정들이 내 머릿속에서 육탄전을 벌인다. 그게 아주 고약하다. 내 일터가, 주어진 (눈에 보이는)일만 해도 돌아가는 환경이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패잔병 같은 얼굴을 하진 않았을거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그 즈음 정신분석 상담을 받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낮은 조도와 이제는 익숙해진 향기가 나는 방에서, 선생님이 아닌, 상담실 어느 귀퉁이를 바라보게끔 위치시켜놓은 카우치에 반쯤 누워 한 시간 동안 시덥잖은 이야기부터 처절한 울음까지 토해내는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일터는 그런 사람이 곁에 꼭 필요할만큼 고된 강도의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수반되는 곳이었다. 선생님은 새로운 일터에서 적응기를 보내고 있는 내가 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내면의 시야를 넓혀주셨다. 가드 없이 인생의 펀치를 맞고 있을 때 날아오는 주먹을 인지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내가 무엇에 맞고 있는 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꽤 괜찮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좀 맞으면서 사니 현실감각이 생겼다. 인생 실전편이라 할 수 있는 노동 집약적인 이 일이 에덴동산 안에서 붕 뜬 채 살고있던 내가 실제 땅을 딛고 설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다.
노동의 세계에 입장한 뒤부터 나는 노동의 숭고함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관절이 사용되는 일, 9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앉을 수도 가만히 서있을 수도 없는 일, 12개들이 우유 박스를 몇 개씩 나르고, 하루에도 수십번 계단을 오르내려야하는 일,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쉬지 않고 해야하는 일. 이 고된 일 사이사이에는 끝없는 정신수양과 체력 단련, 자기 성찰과 희생, 배려와 인내, 근면과 다짐이 켜켜이 쌓여있다. 단 한 조각만으로도 존립에 치명적인 젠가처럼 이 노력들 덕분에 바리스타는 바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깊은 산 속이나 조계사에만 암자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 특히 육체 노동자들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도 닦는 현장이다. 나는 원체 추상적인 사람이라 이만큼 현실적인 일도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고 만다. 더 노골적이고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해 부끄럽다. 하지만 바리스타들은, 적어도 나와 함께 일 해온 동료들은 내일의 출근을 위해 오늘도 서둘러 잠자리에 들고, 운동을 하고, 커피가 아닌 ‘카페 일’에 9할의 시간을 쓴다.
시간 부자
나는 어제부로 프리랜서가 됐다. 백수보다는 프리랜서가 되고싶어 그렇게 부른다. 나는 바 안팍에서 손과 발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조잘대는 사람이어서 그 수다에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일을 그만두어야했다. 속이 시끄러워 잠에 들 수 없는 날도 더러 있었다. 서른 두 살에 감행한 겁 없는 퇴사는 새로운 시작인 동시에 4년치 번뇌의 결과물이다. 뚜렷한 청사진이 있는 건 또 아니고,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을 손에 잡히는 현실로 만드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시간을 만든 것이다. 내 월급으로는 시간을 살 수 없길래 그냥 맞바꿔버렸다.
사람들은 여럿, 내게 용감하다고 말한다. 정작 나는, 백수임을 부인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명이 시작되는 문 앞에서 고매하게 서있진 못하고 있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던 나는, 프리랜서로 통하는 이 문고리를 젖혔을 때 비로소 시작될 황량한 모래 사막을 고독하게 맞아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설레임을 상회하는 두려움과 공포. 어떤 것으로부터도 분리되길 꺼려하는 내가 내딛는 첫 독립이다. 모든 독립은 애잔하다. 연약한 존재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게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위풍당당하다. 주위의 탄식을 오롯이 견뎌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훈장이 있기 때문이다. 훗날의 영광도 홀로 누리게 될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지만 '커피 일'을 한 4년 3개월 동안 나 스스로를 바리스타로 소개하길 마뜩잖아 했다. 내가 세워놓은 직업적 기준이 높은 편이기도 했을 뿐더러 바리스타라면 응당 갖춰야하는 조건들이 내게는 태생적으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끝내 나를 바리스타라고 소개하는 삶을 소화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을 성토할 수 밖에 없겠다. 오랜 시간 꿰차고 있었던 자리에 죄책감마저 든다. 포기했다는 비난도 괜찮다. 끈기를 갖고 '결국은 이뤄내는 사람'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오히려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나선 구도자라고 믿으련다. 결국 탕자로 전락해 다시 귀환하는 일만 없기를 바란다. 사실 뭐, 그렇다해도 문제될 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