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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Jul 09. 2021

아무 생각 없이 아침 등산

 두꺼운 양말 정도만 신어준다면 가벼운 운동화는 뭐든 허용되는 야트막한 동네 산이 있다. 조금 불편한 신발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상(으로 간주되는)에서 매일같이 모임을 갖고, 나처럼 엄마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취미 일환으로 가족 산책을 나오기도 하고, 평일 오전엔 유치원에서 단체로 소풍 나온 무리와도 마주칠 수 있는 산. 그 정도로 어렵지 않은 산이다. 탄현마을 끝에서 시작해 중산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니 동네에서 다양하게 사랑받는 친구같은 산이기도 하다.


 20대초 부터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산에 다녔다. 등산은 경제적이고 손쉬운 취미이기에 가정주부인 엄마는 일찌감치 나에게 등산 습관을 들였고, 꽤 이른 시기에 첫 등산화와 등산복이 갖춰졌다. 다행히 나에겐 엄마 외에도 등산 메이트가 있었고, 사귀던 남자친구들과 등산 데이트를 빌미로 파전에 막걸리를 즐겨 먹기도 했다. 4년 전 몸 쓰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체력을 아끼고 충전시키는 게 더 중요해 보였다. 예전부터 예사롭지 않던 무릎도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했으니 높은 산 오르기가 겁이 나 제대로 등산한지가 이제는 꽤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집 앞 산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산은 익숙한 일상을 차단하는 힘이 있다.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소리가 달라지고, 색이 달라지고, 냄새가 달라지고, 경사가 달라진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기운마저 달라진다. 그 다름이 '원상태로의 회귀'처럼 느껴졌고, 내 자신이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산은 대나무 한 그루 없이도 나의 ‘대나무 숲’이었다. 내 마음 안에서 뒤죽박죽 얽힌 비밀들을 산에 오르며 끄집어내놓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마저 떠올라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주 산에 올랐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기분이었는데, 산에 올라야 정리가 될 법하여 그 기대로 오른건데, 억울할 정도로 내 마음은 고요했다. 분명 문제가 없을리 없는데, 하며 줄곧 자문하다 이런 생각에 다다랐다.


아무 생각 없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마치 삶에 문제가 없으면 안될 것처럼 고민을 쥐어 짜내려 조바심 내고 있는 내가 가여워졌다. 생각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젊음이여! 요즘 장기하의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읽고 있는데 그도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기가 영 쉽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안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영 쉽지 않은 그 아무 것도 안 하기, 아무 생각 안 하기가 노력없이 저절로 되고 있는 이 순간은!! 꽁으로 시간을, 노력을 벌었다고 할 만한 것 아닌가! 오, 모르긴 몰라도 나 지금 꽤나 평안한 상태구나, 요즘 살만하구나, 이렇게 말이다. 생각의 짐을 내려놓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하산하는 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속시원한 마음으로 오늘의 등산이 마무리되려는 찰나, 서로 마주 걸어오던 할머니 두 분이 멀리서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셨다. 잠시 대화를 들어보니(산이란 곳은 웬만하면 크게 말하게 되고 웬만하면 잘 들리는 공간이다)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에 오르는 동네 등산 메이트 이신 것 같았다. 한 분이 집안일이 늦어져 30분 늦게 나와버렸더니 오늘은 서로의 시간이 엇갈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시곤 멀어져가는 친구를 향해 한 분이 이렇게 인사하셨다.


자알 다녀 가시게. 보석 같은 내 친구!


별안간 코 끝을 울리는 호칭이었다. 나에게 보석 같은 존재라는 뜻일까 그 분이 보석 같은 사람이라는 뜻일까, 이와는 상관없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계속 엿보고 싶은 우정이었다! 그 인사가 산에서 메아리처럼 왕왕댔다. 그리고 나에게도 보석같은 친구가 떠올랐다. 의식을 거치지 않고 바로 그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 오늘은 그 친구의 생일이다. 우리는 이제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친구를 만나기 전 살아온 시간보다 알고 난 후 흐른 세월이 4배는 더 길다. 우리는 처음부터 특별히 재미있다거나 이유를 만들어서 만나야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랬던 적이 없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보다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금가락지 같은 친구다. 나에게도 보석 같은 친구가 있다니. 이건 행운이다. 하늘이 내게 주신 복이다. 더 감격스러운 건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어나주어 고맙다는, 연인이나 부모 자식 사이에서 나올 법한 고백을 오늘 그녀에게 해야겠다. 나의 등산 메이트가 되주어 고마워! 태어나주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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