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소 Feb 19. 2022

서른이 되어서야 해외 생활을 시작한 이유

나의 20대 이야기 (아마도 변명, 조금은 불가항력)


해외 생활은 내 오랜 꿈이었다. 10대 시절부터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을 지나치게 싫어했던 나는 언제나 토론식 교육을 받으며 단단하게 성장하는 어느 어느 나라의 청소년들이 너무 부러웠다. 또 어릴 때 해외에서 살다 오거나 방학 때 몇 달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덕분에 영어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몇몇 친구들도 너무너무 부러웠다. 미국 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22살, 1년 동안 휴학하며 돈을 모아서 홀로 50일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행하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았지만, 교환학생이거나 워홀러로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행자들과의 교류 덕분에 해외 생활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복학을 하고, 어떻게든 교환학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1년 동안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그러나 3학년 1학기, 경기가 어려워진 탓에 부모님이 하시던 식당은 문을 닫았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영화를 찍어야 했다.(우리 학교 영화 전공 학생은 영화 워크샵 수업을 듣지 않으면 학점이 높아도 장학금 대상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단편 영화 제작비는 사비로 마련해야 한다.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영화를 찍었다. 나에게 남은 돈은 없었다. 부모님께 교환학생 생활비를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3학년 2학기, 지금의 남편인 산을 만나기 시작했다. 연애 초, 교환학생의 꿈보단 사랑이 중요했다...

 

졸업을 앞둔 시기, 진지하게 해외 대학원 진학을 고려했었다. 영국이나 미국 대학원은 역시나 학비가 발목을 잡았다. 부모님은 계속 손을 벌리는 언니 대신 내가 하루빨리 취직하길 원했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1년 반의 암흑 같던 취준생 시기를 지나 스물여섯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회사는 학교 선배가 재직 중인 스타트업 게임 회사였다. 신입 게임 기획자로 입사해 첫 주부터 몸과 머리가 모두 갈렸지만 게임 기획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중이었다. 두 달쯤 되었을 때 월급을 못 받은 직원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1-2주 만에 약 70여 명이었던 직원의 절반이 회사를 나갔다. 대표는 나에게 100만 원의 월급을 보전해 주겠다고 했다. 100만 원으로는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달 만에 나의 첫 사회생활은 끝이 났다.

 

3개월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경력이었다. 다시 자소서를 쓸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럴 바에야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해외에 가서 돈을 벌고 영어 실력을 쌓아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생각을 하니 오히려 설레기도 했다. 그렇지만 산을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영화 현장에서 일하던 산은 일에 회의를 느끼던 중이었다. 산을 꼬드겨 같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에 지원했다. 함께 캐나다로 떠나는 밝은 미래를 꿈꾸던 것도 잠시, 우리는 둘 다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한 명만 합격하면 어쩌나 하던 고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냥 무작위 추첨인데도 어떻게 둘 다 탈락했는지...

 

그러다 출판사 서포터즈의 경험이 도움이 되어 작은 동네 서점에서 SNS 담당 마케터로 일하게 되었다. 게임 기획자로 일할 때보다도 오히려 적은 연봉이었지만, 커리어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어 정부에서 지원받는 인건비로 인력 충원을 하던 시기에 입사했다. 지원금이 있으니 월급이 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첫 월급날, 대표는 카톡으로 월급이 며칠 늦어질 것 같다고 했다. 이후에도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월급이 늦게 들어왔다. 이미 빚에 허덕이던 대표는 인건비로 들어오는 정부 지원금으로 급한 불을 끄고, 이후에 돈이 생기면 직원들에게 월급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7개월 후, 서점은 문을 닫고 나는 또 실업자가 되었다.

 

다행히 전 직장인 게임회사 대표가 내가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불러 주어서, 공백 없이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게임회사는 몸집을 키우고 있는 큰 게임회사에 합병되어 자금이 넉넉해졌고 다시 이전의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해 직원들을 모으고 있었다. 게임 기획자로서의 커리어가 아쉬웠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에 다시 합류했다. 연봉도 한 번에 꽤 많이 올렸고, 대기업이라 사내 복지도 만족스러웠다.


이제 회사가 망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꾸준히 정기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그즈음, 산과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스물일곱이었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대표는 고작 3개월 수습 기간만 채웠던 내가 대단한 기획자인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는 학교 선배였던 직속 사수가 있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기획서는 당연히 사수의 컨펌 후에 대표의 확인이 이루어졌다.  기획서는 대표의 마음에 들었고, "나에게 한번에 통과된 기획서를  기획자는 네가 처음이다."라는, 90년대나 2000년대 드라마나 인터넷소설에서 나올 법한 "나한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와 별 다를 바 없는 멘트를 들었다.


재입사  사수는커녕 게임 기획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전 기획자들의 기획서를 참고하며 최선을 다해 필요한 기획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  내 기획서는 대표의 성에 차지 않았고, 그는 나의 사수가 당시에 내가 기획서를 혼자 썼다고 거짓말을  같다며, 자기에게 한번에 통과한 기획서는 내 능력이 아니라 사수가 도와줘서였다며, 자신이 나에게 마치 속았다는 듯이, 내가 기대에  미쳐서 실망했다고 말했다.


대표가 만족했던 내 첫 기획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작성한  부족한  일부를 사수에게 코칭받아 수정했었다. 잘해서 칭찬받고 못 해서 지적을 당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마치 내가 원래 능력이 없는데 오해해서 다시 채용했다는 투의 대표의 발언은 다시 열심히 잘해보려던 나의 의욕과 사기를 꺾었다. 이전에 회사가 무너졌던 일도 게임에 대한 확실한 방향성이 없는 대표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획을 계속 엎어서 완성이 늦어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대표는 리더로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수가 없는 나는 그걸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했다.






어느 ,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동네 서점에서 월급이 밀려 고통받을  면접을 봤던 출판사였다. 당시에 불합격 통보를 받고 많이 아쉬웠는데, T.O. 가 생겨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표에 대한 스트레스와 더불어 진행하던 모바일 게임 프로젝트가 출시될  있을지, 비전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다. 뜻밖의 연락이 기뻤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면접을 보러 갔던 회사였다. 그만큼 가고 싶던 회사였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근무지도 가까워 통근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여러 가지 조건이 괜찮았다. 출판계로의 이직을 가장 머뭇하게 했던 것이 출판업계의 낮은 연봉이었는데, 제시받은 금액은 게임 회사에서 받고 있던 연봉보다 100 원이 더 높았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1 2개월째,  번째 퇴사와 네 번째 입사를 했다.


그 선택이 내 삶을 얼마나 갉아먹을지, 그때는 몰랐다.



이전 01화 어쩌다 독일에 온 서른 살 부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