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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Feb 24. 2023

편견이 가한 고통

모르는 사이에 문제아가 되어버린 나

퇴사를 결심했지만, 바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이 시대 청년들이 뼈와 살과 영혼을 갈아 넣어 청춘을 바쳐야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중소기업 재직자 청년내일채움공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내일채움공제'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청년들이 2년, 또는 3년 동안 해당 직장에 근무하며 월 12만 원 - 17만 원가량을 납입하면 만기 시에 2,000-3,000만 원의 목돈으로 돌려주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복지 프로그램이다. 원금에 비해 받게 되는 돈이 훨씬 큰 덕분에 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제도임에 분명 하나, 한번 가입했다 중단하면 재가입이 어려운 탓에 블랙 기업에 들어가더라도 목돈을 위해 어떻게든 2-3년을 버티며 발목을 잡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잠깐 가능했던 3년형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다. 한 달에 165,000원을 납부하면 3년 후에 약 3,000만 원을 돌려받아, 2년형에 비해 수익률이 훨씬 높았다. 다만 3년 동안 이 회사에 꼼짝없이 다녀야 했다. 퇴사를 결심했을 때, 진지하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3년을 버텨서 이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자.'였다. 그래서 버티기로 했다. 


나의 전 직장은 블랙 기업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디멘터에게 영혼이 빨린 해리포터가 되어 갔다. 어둠, 생명이라고는 없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






새로 온 부서장은, 부임하자마자 나를 문제아 취급했다. 안 그래도 버거운 업무를 가중시키는 업무를 지시하길래, '하지 않겠다'도 아니고 "제가요..?"(물론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황당한 지시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을 뿐...)라고 한 마디 하자마자 나에게 동료의식이 없다느니, 공간 매니저로서 책임감이 없다느니 폭언을 쏟아냈다.(그가 나에게 '매니저'라고 했지만, 나는 '매니저'라는 직책도 부여받지 못한 그냥 담당자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담당하던 부서나 우리 부서 애들은 자기 일이 아닌데도 행사가 있으면 야근을 한다며 그런 게 동료 의식이라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1년 동안 야근을 가장 많이 한 직원은 아마도 전 회사를 통틀어 나인데, "저도 야근 많이 했어요."라고 하니 나는 내 업무 때문에 야근을 한 거고, '우리' 애들은 그게 아니더라도 지원 차 야근을 한다고 했다. 나도 이제 새로 온 부서장의 소속 직원인데, 나는 마치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듯이 '우리' 애들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말이 서운했다. 그리고 이상했다. 나를 아직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누구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었길래 나를 책임감도, 동료의식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황당하고 서러웠다.


안 그래도 이전 부서장에게 "내년엔 더 잘 하자."라는 말을 들은 며칠 후였다. 전현 부서장의 연타 공격에 내 의욕과 자존감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이후에도 부서장은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훈계조의 말을 이어갔다. 역시나 근무지가 떨어져 있는 탓에 직접 상황을 보지 않고 다른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에게 화를 내고, 내가 상황을 설명하면 "어디서 변명이야?" 같은 선생님한테도 들은 적 없는 대사를 뱉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부서장 인수인계 과정에서 어떤 얘기를 들은 걸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내 지난 1년이, 누군가에겐 그렇게까지 부족해 보였나? 절망과 회의에 휩싸인 하루하루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부서장이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혹시 인수인계 과정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오갔냐고 물었다. 팀장은 자신도 같이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부서장 성격이 원래 호불호가 심한 타입이고, 자신도 상처를 받은 적이 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 이후 팀장이 부서장에게 살며시 내 이야기를 전달한 건지, 부서장은 이전처럼 내게 불같이 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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