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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Feb 20. 2022

계속 영혼을 갉아 먹힐 수는 없었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불편한 기류가 부서원들과 나의 사이를 쌓아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내가 본사에 가는 시간은 부서원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위해 부서장이 일부러 지정한 시간이기도 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나에게도 친절했다. 이전 회사에서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직원들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었기에, 이번에도 별 탈 없이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입사 초, 긍정적으로 작용하던 관계는 어느 날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부서에는 나와 동갑인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언젠가부터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배들 앞에서 활기차고 애교가 많은 그녀는 나에게는 유난히 무뚝뚝했고, 인사도 잘하지 않았다. 비슷한 연배의 타 부서 직원과 셋이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나온 이야기 화제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라며 의도적으로 나를 배제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먼저 살갑게 말을 걸거나 다가간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반복되는 부정적인 반응에 나도 기분이 상해 그만두었다. 같이 지낼수록 나와 맞지 않는 점이 많았기에 아쉬움은 크게 없었지만, 나를 향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기류는 부서 전체에 퍼지는 듯했다. 그렇지 않은 선배도 있었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매일같이 생각했다. 나의 행동이나 언사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이 있었는지 혼자 추측하고, 걱정했다. 함께 있을 때도 대화에 끼기 힘들었다. 내가 본사에 가지 않는 4일 동안 발생하는,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했고 겉도는 기분은 점점 더 심해졌다. 부서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본사에 가는 날은 점심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다수가 빠지는 건 자연스러웠고, 아무도 미리 알려주지 않아 혼자 점심을 먹은 적도 많았다. 부서에 새로운 직원이 입사하게 되었을 때도 환영 회식 일정을 나만 몰랐다. 나의 긴 휴가 일정과 그의 입사 시기가 맞물려 그랬겠거니 생각하면서도 '그 회식을 일주일만 미뤘다면 큰일이 나는 것인가', '적어도 나에게 미리 물어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도 신경 안 써.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계속 실망하면서도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부서장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은 회사에서 인정 받는 능력있는 여성이었다. 그들의 좋은 점을 닮고 싶고, 잘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애정이 더 큰 문제였다. 좋아하는 이들에게 부정당하는 기분은 내 자존감을, 내 영혼을 계속 갉아먹었다. 

 





그런 내게도 나를 아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행사 기획을 계속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인 회사는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강좌기획팀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아보라고 했다. 다른 부서, 다른 팀이지만 나에게는 팀원이나 마찬가지인 선배들이었다. 우리는 이전까지는 해본 적 없던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고, 함께 진행했다. 선배들은 혼자 떨어져 있는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감사하게도 잘 챙겨주었다. 업무적으로도 내가 돋보일 수 있게 신경 써 주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는 사적인 이야기와 모든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들과 함께 의욕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실현했다. 매장 관리는 여전히 혼자 해야 했지만, 행사 콘텐츠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선배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선배들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입사 초기, 매출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던 부서장은 매장을 오픈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저조한 매출을 보고 "이 정도면 인건비도 나오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압박을 느꼈던 나는 어떻게든 매출을 올리기 위해 유료 행사를 열심히 기획했다. 적게는 월 2회, 많게는 월 5-6회까지 자발적으로 야근을 각오하고 행사를 진행했다. 연초 40%도 달성하지 못했던 월매출목표는 점점 늘어나 최종 연매출목표를 달성했다. 1년 동안 열심히 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냈다는 성취감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일주일 만에 부서졌다.






연말 회식이었다. 몇몇 부서가 함께 모여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가졌다. 별 탈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한 것을 축하하고, 신나게 먹고 마셨다. 자리가 무르익고 2차, 우리 부서원과 부서장이 모여 앉게 되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일부 인사 이동과, 맡은 업무의 변화가 있을 예정이었다.(나는 물론 아니었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는 부서원들에게, 부서장은 지금까지 너무너무 잘했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 믿는다며 따뜻한 말을 건넸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잘해주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나였다.


OO 씨는 내년에 더 잘 하자.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왔고, 무리였던 연매출목표도 달성했고, 1년 차임에도 올 한 해 다른 어떤 부서원보다 많은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년에 더 잘하라고...?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 거지? 모두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이 상황에서, 나에게 건네는 말은 "내년에 더 잘 하자."라니. 그동안의 내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다. 내가 어떻게 열심히 해도 내가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옆자리에서 붙어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적당히 해도 열심히 잘하고 있는 걸로 보이고, 나는 부서에서 아무도 모르는 업무를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대충하고 노는 걸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해서 따로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한 불편함은 모두 내가 감수하고 있는데 노력한 성과와 성실도를 오해하고 몰라준다는 게 서러웠다. 그들에겐 나를 판단하는 것이 너무 쉬웠다. 함께 일하는 선배들은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만, 나를 평가하는 상사는 나의 업무에는 관심이 없고, 어떤 일을 하는지 세세히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추측과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일부만으로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너무나도 불합리했다.


실제로 업무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다.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 '자기 평가'의 점수를 작성했는데, 부서장은 이 정도 점수는 대리 과장 이상이 받을 수 있는 거라며, 점수를 하향 조정했다. 그리고 그 업무평가는 부서의 다른 업무에 필요한 역량 위주로 평가되었다.


내년에는 함께하던 선배들도 없을 예정이었다. 타 부서와의 의견 조율과 수익 배분이 번거롭다고 생각했던 부서장은 내년부터 내게 다시 혼자 업무를 진행하라고 했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눈물을 닦고 생각했다.


이 회사에서 갉아먹히기에, 나는 너무 아깝다.


퇴사를 결심하고, 새로운 부서장이 우리 부서에 왔다.


그리고 더 큰 지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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