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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Feb 24. 2023

대리 승진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사직서를 냈다(1)

언제까지 참을 순 없으니까

그렇게 1년이 또 흘렀다. 코로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서장은 새로운 업무를 부여했다. 도서 홍보 마케팅이었다. 필요 없는 공간 관련 기획들보다 인력이 필요한 신간 마케팅에 나를 투여하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뉴스레터에 쓴 내 글을 칭찬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내가 공간 매니저 역할보다 마케팅 업무를 더 잘 수행할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공간 관리를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업무의 과중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전부터 해보고 싶던 업무이기도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받아들였다. 이번엔 부서장과 팀장도 내가 진행하고 있던 업무들을 그에 맞춰 축소할 수 있게 신경 써 주었다. 


신간 마케팅 업무는 꽤 흥미로웠다. 같이 일하는 선배 마케터가 있었고, 편집자와 함께 의견을 공유하며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이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와 동시에 아쉬웠다. 일정 상 출간 종수가 많고, 한 권 한 권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새로운 마케팅 플랜을 세우기보다 비슷한 방법들이 답습되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지도 않았다. 


또한 가장 큰 기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마케팅 관련 업무를 3-4년을 하며 깨달은 건, 나는 마케팅에 적합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흥미가 생기지 않는 물건을 어떻게든 포장해서 판매하는 건, 내겐 누군가를 속이는 것 같다.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기분이 든다. 널리 알리고 싶은 물건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일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또 누군가의 창작물을 알려주려 애쓸 때면, 나는 언제나 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지 않는 지금이 견딜 수 없어졌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나아진 상황에 만족하며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다. 부서장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다. 자주 얼굴을 마주하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부서장은 종종 칭찬과 격려를 건네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나를 싫어하는 것 같던 부서원은 타 부서로 인사이동을 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별일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그렇게 입사한 지 3년이 지났다.






근무 평가 시즌이 되었다. 입사 3년이 되어, 이번에 승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던 중이었다. 오래 다니지 못할 것 같다고 마음을 먹은 지는 오래였지만, 고생한 보람을 대리 승진으로 얻고 싶었다. 승진을 하면 매년 2%의 임금인상률로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던 월급도 느껴질 정도로 오를 테고, 어쨌든 대리라는 직급을 달게 되는 것이었다.


부서장에게 메일이 왔다. 열어보니 내가 대리 승진 대상자라 인사위원회에 송부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의 업무 방향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승진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은 기뻤지만, 그 이후에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입사 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공간 매니저'로서의 역할이 1인분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서 마케터로서의 업무를 더 큰 비중으로 가져가면서 회사에 어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커리어를 신경 써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전의 업무가 1인분이 아니라는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입사 초기부터 혼자가 너무 버겁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왔고, 현재도 다른 업무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회사에서는 매장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창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고 얼마 전에 나를 닦달하는 사건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장에 나가서, 눈에 보이는 미화 관리와 상품 입출고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한데, 창고가 지저분하다고 내게 분노에 섞인 업무 지시가 내려왔었다. 그러면서 공간 관리 업무 비중을 더 줄이라는 말이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리 업무가 줄어들었어도, 이전 회사에서는 최소 5명이 함께 하던 일이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을, 1인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도대체 그동안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지? 


또 뒤이어 그가 남긴 말은 더욱 황당했다. 내가 계속 혼자 일해서 동료 간에 지켜야 할 업무 예절을 모르는 것 같다는 말로 시작한 그의 말은 남들이 바쁠 때 전화를 대신 받아줘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본사의 내 자리에는 유선 전화기가 없었다.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나의 주 근무지는 다른 곳이었고, 그곳의 내선번호가 있는 상황이라 본사 자리에 전화기 설치를 해주지 않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본사에서 전화벨이 울릴 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전화를 당겨 받은 적도 있었지만 옆자리에 다른 직원이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매일같이 전화를 받으러 일어나서 남의 자리로 가긴 힘들었다. 부서장은 내 자리에 전화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내가 그냥 귀찮아서 전혀 남의 전화를 당겨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민하다 부서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불만이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다듬었다.


'(......)

도서 마케터로서의 업무 비중을 늘려서 가져가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다만 공간 관리에 대한 업무를 회사에서 1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별도의 사업자로 하나의 공간을 운영하는 데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세세한 업무가 많고, 그건 경험해보지 않으면 충분히 모르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전에 담당하시던 분도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다고 그러시더라고요. ㅎㅎ 

제 눈에도 공간 관리에 부족한 점이 보이는데, 그건 다른 분들께도 당연히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간 관리에 업무 비중을 줄이라고 하실 때마다 제겐 사실 부담이 됩니다. 

업무에 들이는 시간이 달라지더라도 책임자는 저고,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업무가 많아서 못 하겠다고 드리는 말씀은 전혀 아니고, 이런 상황을 조금은 이해해주셨으면 해서 말씀드려요. 얼마 전의 일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서라는 걸 조금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그리고 전화에 대한 말씀은 저도 계속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는데요.

제 자리에 유선 전화기가 없습니다... 저도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가서 받은 적도 있는데 매일 같이 다른 분의 자리에 가서 받을 수가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총무부에 말씀드려서 전화기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위의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고, 이해, 격려, 또는 상황에 대한 양해나 오해한 부분에 대한 사과 등이 담긴 짧은 답장이 올 줄 알았다. 근데 그건 그냥 나의 생각이었나 보다. 돌아온 건 예상치 못한 장문의 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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