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소 Mar 17. 2022

부부가 되기로 하면서 했던 약속

내게 너무 소중했던 말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이 되던 해, 진지하게 결혼을 얘기하는 산의 말에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나 아직 외국에서 한번도 못 살아봤는데...?


그 정도로 내 인생의 큰 화두는 해외 생활이었다. 미국 대학 진학 - 교환학생 - 워킹홀리데이를 꿈꾸기만 하고 어느 하나 해보지 못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차녀는 성장에 제약이 있다.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언니가 이미 배웠던 것이었다. 교재를 다시 쓰고, 도구를 다시 쓸 수 있는 편리한 것들.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부모님은 '돈이 없다'고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해도 원하는 건 손에 넣어야만 하는, 떼를 쓸 수 있었던 언니와 달리, 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아들인 줄 알았는데 딸이어서 실망했다는 말을 생일 때마다 듣고 자란 둘째딸은 엄마아빠를 더 이상 속상하게 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 고생하는 것 같은 부모님께 떼를 쓰는 대신 내가 선택한 방식은 '나중에 하자'였다.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어서, 내가 돈을 벌 수 있을 때, 그때 하자.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거야.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내 꿈을 지지하지 않는 부모님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님께 손만 벌리지 않으면, 성인이 돼서 서울에 가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다 나중에 하면 된다고.


나중은 그다음 나중이 되고, 그러다 불꽃은 사라져 버린다.

열정에도 시기가 있다는 걸 너무 나중에 깨달았다. 배움에도, 열정에도 모두 시기가 있다.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교환학생을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자 경험을 쌓고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유럽 여행을 떠났다. 내가 1년 동안 휴학하고 일해서 마련했던 경비를 언니는 눈물과 말 몇 마디로 부모님께 얻어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아예 아일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다. 영어 실력을 늘려야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언니는 모아 놓은 돈이 땡전 한 푼 없었다. 살던 원룸의 보증금을 빼서 가져갔다. 당연히 부모님의 돈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딸의 미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부모, 누군가는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엄마아빠에게는 자식이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그걸 지켜보는 나.







언니가 그렇게 떠난 후, 내 믿음은 깨져버렸다. 그때부터 착한 딸로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모님은 떠나버린 언니를 대신해 내가 빨리 취직을 하길 바랐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게 설계되어버린 나는 분노를 내재한 채 학부 졸업 후 생각했던 유학을 또 한번 미루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나와 언니는 같은 피가 흘렀다. 원하는 건 어떻게든 해야 하는 피. 그 일을 언니는 부모님께 손을 벌려 쉽게 하고 말았고, 나는 손을 벌리는 게 두려워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소망은 병이 되었다. 속이 곪았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지만 든든한 아들 노릇을 하려던 마음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던 노력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난 언니와 비교해서 받은 게 없는데, 부모님은 나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한다. 난 착한 딸이니까. 난 스스로 알아서 잘하니까. 난 돈을 쓰지 않아도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니까. 아픈 손가락은 나인 줄 알았는데 부모님에게 아픈 손가락은 언니였다. 매번 속을 썩이는 언니는 원하는 걸 다 가지고,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난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속이 상해 울면서 말하던 날, 엄마는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가 망하고, 한번도 제 때 월급이 들어온 적 없는 두번째 회사를 다닐 때 내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언니는 아일랜드의 어학 비자 기간이 끝난 후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캐나다에 살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행복한 캐나다 생활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왜 언니처럼 살지 못했지?  왜 나는 그렇게 단념이 빨랐을까? 왜 나는 모든 걸 나중으로 미뤘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착한 딸로 살았을까?


불안정하고 어두운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산은 위험을 감지했다.

무언가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산은 결혼을 이야기했다. 어렵게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3번째 회사에 막 입사한 참이었다. 지금 결혼을 한다고? 모아놓은 돈은커녕 신용카드로 다음 달 월급을 까먹으며 겨우 살고 있었다. 결혼 얘기가 처음 나온 건 아니었다. 4년 가까이 만나면서 우리는 종종 결혼을 이야기했고, 즐거운 미래를 그렸다. 사실 나에게는 대학생 부부라는 허무맹랑한 꿈이 있었는데, 너무 허무맹랑해서 당연히 실현하지 못했다. 산도 나도 결혼을 일찍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내게는 언제나처럼 '내가 벌어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굳은 의무감이 있었다. 당장 결혼자금이 없으니 당연히 먼 미래로만 생각했던 결혼이었는데, 산이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거였다. 아버님이 정년 퇴임하시기 전에 결혼을 하길 바라시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올해 안에 결혼하면 부모님이 결혼 비용을 지원해주시고, 아니면 없대."

"전혀?"

"응, 전혀."


산의 부모님은 우리가 만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외동아들을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다. 그때는 '3년 안에 결혼해라'였는데, 그 3년이 지나서 정년퇴임의 기한이 다가온 것이었다. 


1년 전,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 결혼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1-2년이면 결혼 자금을 적게라도 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당장 1년 후, 중소기업 신입의 월급으로는 자취생에게 저축도 사치였다. 흠... 내가 지금 호기롭게 "제가 돈을 벌어서 나중에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한다고 정말로 2-3년 후에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냥 한 살이라도 어려서 "돈을 모을 시간이 없었어요.. 헤헤 감사합니다(넙죽)" 하는 게 덜 창피하려나?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서 데이트 비용도 많이 드는데, 차라리 결혼하는 게 이득인 건가?


우리가 헤어질 것 같진 않았다. 산은 어둠으로 가득 찬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내가 가장 고통받던 시기에 내 옆에서 무너진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들어 주었다. 그의 존재 덕분에 버티는 하루하루였다. 오히려 내가 산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돈, 그리고 나머지 딱 하나였다.


"근데, 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

"뭔데?"

"나는 엄청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걸 아직 못 해봤거든. 근데 내가 결혼을 하면 그걸 영영 못 하게 될 것 같아서 좀 두려워."


산은 내 얘기를 듣고 말했다. 어머니가 산이 어릴 때 미국에 공부하러 가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 하셨다고. 지금까지도 부모님이 다투실 때면 그 이야기가 종종 거론된다고 했다. 


"자기가 공부하러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보내줄게."

"정말?"

"응. 난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 좋겠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 하고 살아온 내가, 누군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언제나 할 수 없다는 말만 들어온 내게, 빛을 안겨준 말이었다.


"그럼 약속해."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그 말에 나는 홀라당 넘어가버렸고, 그해 11월에 우린 부부가 되었다.






이전 08화 대리 승진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사직서를 냈다(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