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소 Feb 21. 2022

대리 승진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사직서를 냈다(2)

아꼈지만 아껴지지 못했고, 그럼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던 회사 이야기


용기를 내서 고르고 고른 말에 돌아온 그 메일에 담긴 내용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부족한 직원이었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었다. 10가지가 넘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며, 각각의 상황이 나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렸고, 그 때문에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본인이 하고 있는 노력이 이런 것이라는 구체적인 항변이었다. 그 사례 중 대부분은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다. 본인이 부서장이 되기 전, 나와 이전 부서장 사이에 있던 일들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오해로 인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실수한 점도 분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이상하게 판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몇 가지 예시는 다음과 같았다. 사장이 나를 찾아와서 뜬금없는 업무를 내가 하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할 수 없어서 부서장과 상의해보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사장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장은 내 업무 상황에 대해 모르는 상황이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승낙하는 것이 오히려 절차상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한 대답이었는데, 더 높은 직급의 사장이 지시한 일을 거스르고 부서장과 상의하겠다고 한 것이 마치 궁녀가 왕명을 거역하고 영의정과 상의하겠다고 것처럼 인식되었나 보다. 이 회사의 인사체계가 마치 조선시대와 같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당시 부서장이 "사장님한테 나하고 상의해보겠다고 말하면 어떡해. 사장님이 더 높은데."라고 했을 때도 부서장이 괜히 농담조로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에서는 그게 엄청난 일이었나 보다. 


그리고 근무지 이탈 건에 대해서도, 내가 노조지부장에게 남긴 말이 아주 맹랑했다고 했다.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회사가 잘못했다는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여줬다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나는 다만 모두 처음 겪는 상황에서 회사가 보여줬던 미흡한 부분을 회사가 깨닫고 다른 직원에게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당부를 전한 것이었는데, 그것 또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서 잘못을 반성해야지, 어디서 사원급이 맹랑하게 과정의 문제를 지적해? 하고 생각했나보다.


부서장의 메일로 내가 의심하던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나의 몇 가지 실수와 여러 가지 오해들, 그리고 생각보다 더 극강이었던 회사 내부의 꼰대력이 믹스되어 이전 부서장은 나를 문제아로 여겼고, 현 부서장에게의 인수인계 과정에서 나를 요주의 인물로 짚어주었던 것이다. 현 부서장은 부임할 때부터 그 문제아를 고쳐놓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고. 


내가 아무리 애쓰고 잘하려고,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그들에게 나는 이미 이상한 사람, 사회생활 못 하는 사람, 문제아였다. 내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현 부서장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려놓았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고, 내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아무리 고민하고 말을 골라 소통의 물꼬를 트더라도, 군말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순간 나는 또다시 이상한 불만 종자로 돌아갔다. 회사 내 나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그 메일을 받고,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애써왔던 나의 모든 노력이 의미 없는 일로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해도 그들은 나를 이상한 존재로 생각할 것이었다. 내가 그들의 생각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허망해진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는 더 이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일말의 책임감도, 의욕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 주말 동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살았다.


그리고 다음 주, 팀장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나의 퇴사 통보에 팀장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팀장에게 쌓아뒀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 부서에서 가장 허물없이 나를 대해주었던 팀장님은 내 얘기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차분히 듣더니, 그동안 나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나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힘든 업무를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렇게 그만두긴 나의 커리어가 아까우니 원한다면 다른 업무로 변경해줄 수 있다고, 며칠만 더 고민해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고민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며, 승진 처리가 되기 전에 빨리 퇴사 소식을 알리는 것이 이후의 일처리에도 더 나을 것 같다고, 다음 날 부서장에게 바로 전달해달라고 말했다. 안타까워하는 팀장님의 모습과 미안하다는 말에, 무너졌던 내 마음이 조금 일으켜 세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소식을 들은 부서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냐며, 네가 정 그렇다면 내일 사직서 가져와.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다음 날, 부서장이 면담을 위해 날 불렀다.


부서장은 자신이 보낸 메일 때문에 홧김에 결정한 일 아니냐며, 잘 생각한 거 맞냐고 물었다. 나는 홧김이 아니고, 이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고 했다. 부서장은 자신이 그런 메일을 보낸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 말했다. 자신은 나를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오히려 유쾌한 어투로 내가 사회생활 스킬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이미지가 초반부터 꼬인 것 같다며, 자신은 그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나도 그만두는 마당에 할 말은 하자 싶어, 부서장이 오기 전 어떤 일이 있었고, 몇몇 일은 오해였으며, 내가 이 부서 내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 속 터놓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랑 동갑인 부서원 A와 그와 친한 B가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회사에서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A가 나를 싫어한다는 건 느꼈지만, B가 내 욕을 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B도 언젠가부터 나에게 거리를 둔다는 건 알았지만, B는 그래도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전하는 이였다. 부서장은 B가 나에 대해 한 얘기를 나에게 상세히 전했다. 그 내용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스타벅스 커피가 아니면 안 먹는다고, 스타벅스 커피를 사 오라고 시켰다는 거였다. 그것도 "OO 씨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요!" 하면서 씩씩대면서 이야기했다고 했다. 너무 황당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행사를 준비하던 중, B가 나에게 커피를 사 올 건데 뭘 먹겠냐고 했고, 커피 전문점 커피를 사 온다는 말인 줄 알았던 나는 디카페인 커피를 부탁할 요량으로 스타벅스에 갈 거냐고 물었다.(회사 바로 옆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B는 아니라고, 편의점에 간다고 했고, 카페인을 먹지 못하는 나는 아, 그럼 괜찮다고, 내 커피는 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근데 이걸 내가 스타벅스 아니면 안 먹는다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 오라고 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닌 거였다. 이런 말이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입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던 것이 부서장의 말을 들으며 선명해졌다. 그렇게 마음 끓이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되뇌던 일이 이토록 어이없는 말들 때문이었다니. 나를 깊이 있게 알기 전 A와 B의 말을 들은 이들은 은연중에 나를 그런 사람으로 판단한 거였다. 이미 편견을 내재한 채, 나를 자주 보지 못하고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를 그들 이야기 속의 '또라이'로 형상화시킨 거였다. 나를 직접 경험했음에도. 이미 친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사실로 여겼다.


그들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정과 아쉬움을 털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의 사람들을 내가 좋아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고, 내 자존감을 잃었구나. 그럴 가치가 전혀 없었는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걸로 내 욕을 하고 다녀. 씨발.


면담을 끝내고, 웃으며 부서장에게 사직서를 전달했다.


웃으며 한 달을 더 회사에 출근했다.






3년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성실하게 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는데 왜 그들은 나를 싫어할까. 내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 사람인가? 내가 비호감인가? 내가 그렇게 일을 못 하나? 내 말투가 불편한가? 내가 친절하다는 생각이 착각인가? 


그렇게 쪼그라든 채로 살았다. 내 소중했던 20대 후반에, 가장 자신감 넘쳐도 괜찮은 시기에 그렇게 살았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나를 오래 봐 온 선배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이 일하다 보면 쎄한 구석이 있거나 선을 지키지 못 하는 느낌이 들거나 사회 생활 스킬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를 볼 때나 나와 대화할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내겐 연고였다.






한 달 전부터 팀장님만 이야기하던 나의 퇴사 파티는 돌아가면서 출근과 재택을 병행하는 회사의 방침으로, 마지막 출근일 점심에 겨우 부서원 전원이 모이지 못한 채로 진행되었다. 법인카드로 장어를 먹었다. 이전 퇴사자들에게 선물을 해주던 관례는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내 마지막 출근일 전날이었던, 신입사원 입사일에는 나를 제외한 전원이 출근했고, 신입사원은 부서에서 따로 마련한 축하 꽃다발을 받았다. 


반년 동안 도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편집부에서는 본부장님과 편집부 전원이 나를 위한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1년 동안 함께 일했던, 일상을 나눴던 내 소중한 선배들은 선물과 축하 파티를 준비해주었다. 꽃다발도 받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났던, 함께 사무실을 썼던 선배들은 사비를 털어 맛있는 밥을 사주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몇몇 선배들에게 받은 꽃과 선물은 끝까지 버려진 것 같은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날, 본사에서 나와 내 진짜 사무실에 왔다.

회사 게시판에 퇴사 인사를 썼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많이 울었다.


선배가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짝사랑이었네."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회사 생활은 끝이 났다.




이전 07화 대리 승진 소식을 들은 며칠 후, 사직서를 냈다(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