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하루에 찾아온 어린 날의 맛

새삼스러운 일 투성이었던 어린이날_스낵바 매점

by 지소

어린이날이었다. 빨간 날 가뭄인 2020년에 처음이자 유일한 휴일이 쏟아졌던 4월 마지막 주 – 5월 첫 주 연휴의 마지막 날. 야심에 찬 7일 연휴 계획은 월 결산 보고서 때문에 5월 4일에 출근하게 되면서 무너졌지만, 하루 출근 후에 다시 얻은 꿀 같은 휴일이었다. 월요일 다음에 바로 일요일이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예상치 못했던 산의 가족 식사가 잡혔다. 아버님의 3형제 부부와 할머님까지 함께 모이는 나름 대가족 식사였는데, 어버이날을 미리 챙기기 위한 자리였다. 어버이날에 시부모님을 찾아 뵐 계획이었던 터라 산과 나도 참석했다. 미리 준비한 카네이션을 드리고, 목동의 한 돼지갈비 집에서 최선을 다해서 고기를 집어먹는 것으로 가족 식사 시간이 끝났다. 어린이날인데, 며느리의 역할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선물을 받던 어린이 시절이 지났다는 건 예전에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며느리는, 너무 어른이잖아.


산은 작업실로 가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길, 지상으로 올라간 지하철의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좋았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주중의 햇살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대낮의 시간을 더 즐기고 싶어 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작업 중이라 한두 시간 후쯤 만나자고 했고 잠깐 집에 들러 얼마 전부터 준다, 준다 했던 갈비탕 두 팩을 챙겼다. 한 시간 동안 영화를 볼까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선잠에 들었다. 짧은 꿈을 꾼 것 같은데 희미한 형상만 남았다.


근처의 따릉이(서울시 공공 자전거 대여 서비스) 대여소에는 자전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세번째로 가까운 대여소에서 어린이와의 눈치 게임 끝에 겨우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빼앗은 건 아니다…). 불광천 진입로가 막혀 한참을 빙글빙글 돌았다. 지도 앱에서 알려주는 길은 자전거가 내려갈 수 없는 계단(내가 포기하고 1분 후에 한 청년은 자전거를 들고 거길 내려갔다. 힘의 박탈감….)이었다. 결국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공사 중인 흙 길을 조심히 내려가는 부부의 뒤를 따라 겨우 불광천의 자전거도로에 진입했다. 여유롭게 라이딩을 즐기려던 계획이었는데 현실은 스믈스믈 올라오는 땀에 짜증이 나 청자켓을 벗어던졌다. 이놈의 무거운 청자켓은 왜 입어서 고생이람. 무사히 솜의 집에 도착해 갈비탕을 전달하고, 초록빛 다리의 빈티지한 와인잔에 담긴 탄산수를 마셨다. 일희일비의 아이콘답게 탄산수 한잔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시원하고 또 시원해.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분명히 두 시간 전에 돼지갈비를 양껏 먹었는데. 망각의 장기를 가진 것인가? 아무래도 편하기만 한 자리는 아니었던 지라 마음의 허기는 남아 있었나 보다.(이렇게 또 합리화를 한다.) 내가 출출하다고 하니 솜이 가벼운 간식거리를 먹을 수 있는 좋은 가게들을 줄줄 읊었다. 언제나 날 좋은 곳으로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 빵 부스러기를 따라가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쫄래쫄래 그녀의 뒤를 좇았다.



‘스낵바_매점’은 응암동에 위치한 작은 가게다. 입구부터 빈티지한 파란색 타일 벽과 아기자기한 표지판이 반겨주고, 가게 밖 야외 공간에 있는 테이블들은 마치 고즈넉한 교외의 느낌 있는 마당(or 정원) 같은 분위기를 더한다.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장님의 취향이 반영된 따뜻한 공간이 나온다. 판매하는 메뉴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스낵바_매점’이라는 이름이 찰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접 매장에서 튀긴 ‘올드 패션 도넛’, 감자 샐러드를 와플기에 구운 ‘감자 와플’ 그리고 다양한 토핑을 추가할 수 있는 감자 샐러드를 판매한다. 커피, 맥주, 아이스크림, 메론 소다를 비롯한 시즌 음료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좌) 감자 샐러드+달걀+빵 / (우) 명란 감자 사라다


우리는 달걀과 빵을 추가한 감자 샐러드와 ‘명란 감자 사라다’를 주문하고(메뉴 이름이 '사라다'다. 샐러드와 '사라다'가 주는 어감의 차이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입을 벌린 빵 안에 놓인 귀여운 감자 샐러드 두 스쿱과 와플 모양의 명란 감자 사라다가 우리 앞에 놓였다.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자극적이지 않은 감자 샐러드를 한입 베어 무니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맛이 떠올랐다. 새삼 기분이 묘했다. 오늘 이런 단순하고도 특별한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내일은 출근을 해야 한다는 걱정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내가 새삼스러웠다.

짭조름하고 살짝 쌉쌀한 명란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명란 감자 사라다도 맛있었다. 와플기에 구워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쫀득한 감자의 맛이 기분 좋았다.


나란히 앉아 감탄하며 허기를 채우던 중, 솜이 이곳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낵바_매점’이 있는 이 건물은 ‘풍년빌라’라는 곳인데 건물주가 <시그널>과 <킹덤>을 집필한 드라마 작가 김은희라는 것이다. 스낵바_매점의 위층에는 김은희 작가의 지인들이 거주하고, 10년 월세 동결이라는 파격적인 계약 조건으로 입주해 살고 있다. 풍년빌라에 얽힌 이야기가 좀더 궁금해 찾아보니, 김은희 작가는 강남에 건물을 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돈이 돈을 버는 구조에 반대해 왠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 지인을 포함한 세 가구가 함께 살 집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풍년빌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김은희 작가가 부러웠다. 드라마 작가로 잘 나가는 것도 부럽고, 글로 돈을 많이 번 것도 부럽고, 이런 곳의 건물주라는 것도 부럽고, 그 돈으로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멋진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도 부럽고. 누군가는 이런 멋진 곳을 소유하고 있고 누군가는 삶을 한탄하고 있고…


비록 중간에 한탄 모먼트가 있었지만, 평온한 간식 시간을 즐기고 차오른 배와 기분으로 우리는 따릉이를 타러 갔다.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는 솜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새절역 바로 앞에 있는 따릉이 정류소에 갔는데 한 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휴일이라는 걸 망각했다…. 가만히 기다리면 누군가 올 것 같았는데 1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시 따릉이 앱을 켜서 확인하니 응암사거리에 3대의 자전거가 있다고 나왔다. 포기했을 법도 한데 감자의 힘이었나? 솜을 새절역 앞에 두고 나는 응암사거리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약 7분 후, 내 눈앞에는 3대의 자전거와 그것들을 차지하고 있는 3명의 사람을 마주했다…. 억울해서 응암사거리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새 자전거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활활 불타오르는 오기로 3대의 자전거가 있다는 응암역까지 걸어갔다. 이번에도 없으면 그냥 지하철 타고 올 거야… 씩씩대며 한참을 걸어 도착한 정류소에는 한 커플이 2대의 자전거를 대여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자전거를 향해 달려가서! 재빠르게 앱을 켜고 QR코드 태그! 띠리링~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따릉이를 손에 쥐었다… 너 하나 빌리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이놈아…


바람을 가르며 쌩쌩, 솜의 앞에 도착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는 게 처음이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어릴 때 아빠가 내게 처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던 때를 떠올렸다. 네발 자전거를 타다, 보조 바퀴를 떼고 처음 두발 자전거를 타던 그때. 나는 중심을 잡는 것이 어렵고 무서워서 아빠가 자전거를 놓을까 봐 계속 걱정했다. 제발 놓지 말라고, 놓지 말라고 말하면서 페달을 밟고 있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멀어진 아빠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빠가 분명히 손을 뗐는데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발도 마음도 붕 떠오르던 그 기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땐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비틀거리던 솜도 나름 중심을 잡고 혼자 꽤 긴 코스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의 아빠처럼 나도 흐뭇한 표정으로 솜을 지켜봤다. 아빠에게 자전거를 배우던 꼬마였던 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회사에 가기 싫어하는 직장인이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물주와 부동산 시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한결같이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이는 막상 어른이 되니 어린이가 되고 싶다. 두발 자전거의 중심을 잡고 페달을 밟았을 때 둥둥 떠오르는 것 같던 그 기분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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