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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07. 2024

우리 이혼하자

너에게 이 짐을 지울 수는 없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엄마의 빚이 500만원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엄마가 내게 빌린 돈을 매달 조금씩 갚기로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을 때 물었다. 친구에게 50만원 씩 갚아도 엄마 월급이 남는데 왜 나에게 돈을 주지 않냐고. 그때 카드빚이 남아서 남은 월급은 그걸 갚고 있다고 했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는 독일 대학에서 첫 학기를 보내고 있는 내 인생만으로도 너무 힘들었고 내가 엄마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 정신적 짐을 짊어지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며 외면했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언니는 작년 10월에 엄마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고 했다. 돈만 넣으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돈이 없다고, 가진 돈을 물었다고 했다. 





10월의 그날을 기억한다. 12년 만에 다시 입학한 대학교의 첫 친목 도모 행사가 있던 날, 베를린에 오자마자 운 좋게 일자리를 얻은 까페에서 마감 업무를 마치고 늦지 않으려 서둘러 트램을 탔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엄마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한국은 새벽 두 시가 넘었을 텐데... 답장을 보냈더니 음성 전화가 걸려왔다. 힘이 없지만 잠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보통은 밤 9시만 되어도 목소리에서 잠이 묻어나던 엄마였다. 안부를 물었고 내가 다시 묻는 안부에 기묘하게 달뜬 목소리가 돌아왔다. 


“니 예전에 주식 좀 한다고 했제...?”

“어, 왜?”

“그거 한 500만 원 되나?”

“원래 그랬는데, 얼마 전에 다 정리했다. 비자 신청할 때 잔고 증명 필요해서.”

“아... 니는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아... 니 지원(가명) 씨 알제? 엄마랑 운동 같이 하는 이모 있잖아. 그 이모가 엄마한테 엄청 잘해주거든. 엄마가 주식을 하다가 쪼끔 손해를 봤는데, 그걸로 너무 속상해하니까 지원 씨가 ‘언니, 그걸 왜 이제 말하노.’ 하면서 자기가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는데 엄마한테만 알려준다면서, 그걸로 돈을 많이 벌었대.”


속에서 여러 감정의 덩어리가 뭉쳐서 올라왔다. 아, 엄마는 왜 이렇게 순진한 걸까. 아니, 왜 무지한 걸까. 엄마를 향한 연민과 분노가 끈적거리다 결국 분노가 더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는 정보를 엄마한테 왜 알려주냐고. 그렇게 좋은 정보면 가족이나 더 소중한 사람한테 알려주지 엄마가 그 사람한테 뭐냐고. 그 정도로 쉽게 돈 버는 방법이 있으면 세상 사람이 다 부자가 됐다고. 내가 한 달 전에 비자 연장을 위해서 한참을 고민하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200만 원을 빌린 게 기억나지 않냐고, 내가 지금 회사도 그만두고 공부하겠다고 독일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겨우 살고 있는데 엄마는 나한테 지금 500만 원을 달라는 소리가 나오냐고. 일하고 돈 버는 언니를 두고 왜 나한테 그러냐고. 


“언니는 좀 못 미더워서... 아빠한테 말할 거 같아서...”


트램에서 내려 베를린 한복판에서 한국어로 소리치던 나는 결국 그 말에 다시 굴복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이 가족에서 알량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고 믿게 한 그 말. 언니보다 내가 낫다는 그 말. 언니보다 내가 더 엄마를 이해한다는 그 말.


엄마에게 너무 심하게 말했다는 생각에 언성을 낮추고 엄마를 달랬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귀가 얇고 다른 사람 말에 혹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해. 세상에 그렇게 돈을 빨리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나도 괜히 주식하다가 엄청 손해 보고 이번에 정리했잖아. 주식이든 투자든 내내 공부하고 집중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우리는 그런 거 하면 안 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주는 고급 정보는 대부분 사기야. 그런 건 순진한 사람들 꼬여내는 말이야.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 그러니까 엄마, 진정하고,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다 줄게. 그러니까 투자든 주식이든 그런 거 하지 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엄마는 울먹였다.


“돈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돈을 벌고 있는데, 나만 돈을 못 번다. 돈이 없어서.”





언니의 전화를 끊고 나서 방에서 나오자 남편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10년을 나와 함께하며 고생만 한 너. 불안정하던 나를 받쳐준 너. 같이 학교 다니던 때에도, 2년 가까운 취준생 시절에도, 박봉에 월급이 밀리던 스타트업 입사와 퇴사를 거쳐 하루하루 정신이 말라가던 마지막 회사에서 일할 때도 나를 먹이고 입히며 내 옆에 있던 너.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덧날 때마다 내 눈물을 닦고 안아준 너. 언제나 나를 응원하는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두고 독일까지 와준 너. 

그리고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너.


너에게 이 짐까지 지울 수는 없어. 우리 엄마의 짐까지 너에게 지게 할 수는 없어.


“우리 이혼하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웃음기 띤 얼굴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인데 그래.”


“엄마가 주식에다가 선물옵션 투자까지 해서 집에 빚이 엄청 많이 생겼대. 내가 분명히 이걸 감당해야 할 텐데, 나는 자기한테 그러라고 할 수가 없어. 우리 그냥 헤어지자.”

“에이- 무슨 소리야. 빚이 얼마나 많은데. 진정하고 같이 방법을 생각해보자.”

“자기는 지금까지 나 때문에 고생만 했는데...”

“아니야, 왜 그래.”


그의 다정한 손길에 나는 주저앉았다.


“자기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나 만나서 고생만 해... 자기는 아무 죄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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