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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14. 2024

엄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모든 게 끝날까

한국에 온 뒤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냉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보일러도 틀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곳은 아빠의 침대와 엄마의 침대뿐이었다. 상경한 이후 본가에 내려가면 언제나 원래 내 방이었던 엄마의 방에서 엄마와 함께 자곤 했다. 이번에도 당연하게 그렇게 되었지만, 잠든 엄마의 숨소리 옆에서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몇 시간을 눈을 감고 있어도 그랬다. 


엄마는 내가 모든 것을 캐내서 알게 된 이후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그랬을 거다. 누군가에게 알려질까 봐 끙끙 앓고 감추던 시간들에서 엄마는 완벽하게 혼자였을 거다. 그 무거운 짐을 혼자 견디다가, 내가 나타나서 해결책을 찾아보려 하는 일들이 엄마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더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이었을 거다. 엄마는 내가 온 뒤로 아주 잘 먹고, 아주 잘 잤다.


엄마가 던진 짐을 고스란히 받은 나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낮에는 비협조적인 엄마 앞에서 울고, 윽박지르고, 달래면서 감정을 다 소진하고, 밤이면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됨을 느꼈다. 속 편하게 자고 있는 엄마의 옆에 있으면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고통스러웠을 엄마가 잘 자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도저히 잠에 들 수 없는 내 옆에서 잘 자고 있는 엄마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어떻게 그렇게 속 편하게 혼자 잘 잘 수 있냐고. 


밤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엄마 옆을 피해 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담요를 돌돌 감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있거나, 한기로 가득한 작은 방에 문을 닫고 앉아 내가 가장 사랑했던 만화책을 읽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이해하지 않으려 할 때 어린 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야기 속으로 계속 도망쳤다. 그러지 않으면 이곳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핸드폰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엄마의 입출금내역을 확인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뱅킹 앱에 접속해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주말이 지난 뒤, 첫 출근을 했던 월요일에, 엄마가 직장에 있었던 오전에 90만원의 출금 내역이 있었다. 계좌주명이 이상했다. 분명 사기 거래소였다. 엄마는 나와 떨어져 있던 그 몇 시간 사이에 또다시 사기 거래소에 돈을 입금한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 이게 뭔데?”

“뭐, 왜.”

“여기 이거 90만원 출금내역 뭐냐고. 또 거기다가 돈 넣었나?”

“아니 넣긴 했는데... 바로 다시 뺐다. 돈 다시 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또 돈을 넣었다고? 엄마 진짜 미쳤나?”

“아니, 니가 사기라고 하니까 돈 빠지는지 확인하려고 그랬다니까?”

“그걸 왜 확인하는데? 내가 독일에서 엄마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거 안 보이나? 그런데 거기 돈을 또 넣는다고?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 내 말이 진짜 말 같지가 않나?”

“그래서 니 말 듣고 나서 가슴이 떨려서 못 하겠더라. 하려고 했는데 가슴이 떨려서 못 하겠어서 바로 돈 뺐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다시 돈을 입금했다는 사실을. 엄마가 제어가 되지 않는 환자라는 말을 듣고 난 이후였지만, 엄마가 어떻게 이 상황에서 다시 그럴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 내가 안 보이는 걸까. 


노트북을 열었고, 엄마의 공인인증서를 복사했다. 내 핸드폰에 엄마가 사용하는 인터넷 뱅킹 앱을 몽땅 설치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다. 앞으로 엄마의 입출금내역을 내가 실시간으로 확인할 거라고. 허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엄마는 노발대발했다. 니가 대체 왜 나를 감시하냐, 타인의 공인인증서를 이용하는 건 불법이다, 개인정보위반으로 신고하겠다며 나에게서 핸드폰을 뺏으려고 했다. 


“신고해 봐. 신고해라. 나는 이제 엄마를 절대 믿을 수가 없다. 엄마는 지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아니다. 같이 감옥에 가든지 죽든지 하자.”


핸드폰을 잡고 절대 주지 않는 나를 보며 엄마는 씩씩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인증처리를 마친 후 내 노트북과 내 핸드폰에서 엄마의 금융거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작업을 마친 후 조용해진 엄마에게 가보니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사기 아니다. 출금 신청하니까 바로 출금 됐잖아. 니도 내역 봤잖아. 사기면 내가 돈을 넣었으면 안 줘야지.”

“엄마, 그거 다 엄마를 믿게 하려고 돌려주는 거라고. 출금되는 거 확인시켜주고 더 큰돈을 계속 뺏는 거라니까?”

“니가 한번 봐봐. 니가 들어가서 한번 봐봐라, 다시.”


엄마는 못 보던 노트북을 가져와서 자신이 이용하는 거래소 프로그램을 보여줬다. ‘㈜이베스트투자증권’이라는 이름의 아이콘을 클릭하니, 딱 봐도 조잡해 보이는 프로그램이 열렸다. 실제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차트가 보이고, 예수금 항목이 있었지만 무언가 축약되어 있고 간편해 보였다. 


엄마의 눈앞에서 유튜브 검색창에 ‘이베스트투자증권’을 입력했다. 실제 증권사인 이베스트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었다. 해당 채널에서 ‘해외선물 HTS 사용법’을 알려주는 동영상을 찾았다. HTS는 홈 트레이딩 시스템(Home Trading System)의 약자로, 개인 PC에서 주식과 파생상품 등 금융 투자 거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했다. 그 동영상에서는 자사의 HTS의 화면을 보여주며 상세하게 선물 거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화면에서 보여주는 HTS 이미지는 엄마가 설치한 프로그램과 확연히 달랐다. 


“엄마, 이거 봐봐. 여기가 이베스트투자증권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인데, 지금 엄마가 쓰는 거랑 완전히 다르잖아. 엄마가 쓰는 거는 이베스트를 사칭한 가짜 거래소라고. 진짜 투자를 하려면 여기 증권사에서 엄마 명의의 계좌를 만들어서 이 증권사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해야 진짜 투자가 되는 거라고. 근데 엄마는 걔네가 무슨 링크 줘서 다운 받으라고 했지 여기서 받은 거 아니잖아.”


엄마는 그 동영상을 유심히 보더니, 나에게 그 동영상에서 시키는 대로 계좌 개설을 해보라고 했다. 정말 다른지 확인해야겠다면서. 뭔가 이상했지만 엄마에게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내 명의의 계좌 개설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계속 본인의 명의로 계좌 개설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왜 엄마 명의로 해야 하는데? 내 껄로 한다니까?”

“아니, 좀. 그냥 엄마 이름으로 해봐라.”

“엄마 이름으로 왜 하는데? 엄마는 이제 돈도 없고 투자를 절대 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아니, 좀 그냥 해봐라!”
 “그냥 왜 하냐고! 엄마가 이걸 할 수 있을 것 같나? 사기든 아니든 해외 선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엄마가 도대체 뭘 알아서 해외 선물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하던 프로그램 말고 진짜 엄마 명의 계좌로 하면 되잖아. 이 리딩방에서 진짜 잘 알려준단 말이야. 니가 말하는 가짜 거래소 말고 진짜 거래소에서 리딩방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거 아니가.”

“엄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리딩방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엄마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앉아 있는 엄마의 다리를 마구 때렸다. 


“엄마, 진짜!!!!! 왜 그러는데 도대체!!! 엄마, 엄마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렇지, 내가 지금 엄마 앞에서 뭐 하고 있는지 안 보이나? 왜 계속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돈을 잃어놓고, 여기 이 집을 다 날리게 생겼는데, 엄마 때문에 아빠도 빚더미에 앉고, 나도 독일에서 여기까지 오고, 내가 2년 동안 공부해서 들어간 학교 첫 학기도 엄마 때문에 다 망쳤다고!!! 나는 이혼할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우리 인생을 어디까지 망치려고 그러는데??? 아무리 미쳤어도, 아무리 정신이 안 차려져도, 자식이 눈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려는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니가!!!! 진짜 내가 죽어야 정신 차릴 거가!!!!!”

“............ 니가 왜 죽노. 내가 죽어야지.”


정말로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죽으면 이 모든 게 끝날까. 엄마가 정말로 죽어버린다면 이런 말을, 이런 생각을 한 나를 절대 용서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그냥 끝나버리지 않을까. 엄마가 빚만 남기고 죽는 게 빚이 더 늘어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면 나는 살 수 있을까. 나는 괜찮을까. 그냥 내가 죽는 게 이 모든 것을 외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을 먹고, 병원에서 받아 온 엄마의 약을 챙겨줬다. 엄마는 약 앞에서 인상을 쓰면서 먹기를 주저했다. 본인을 살리기 위한 약을 왜 내가 억지로 먹여야 하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엄마는 환자다.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화를 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약을 먹였다. 


엄마가 잠들고, 아빠도 잠들고, 또 혼자 남았다. 언니에게 병원에 다녀왔냐는 메시지가 왔다. 설명하기도 지쳤다. 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에 오지도 않고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으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왜 이렇게 안 했냐, 저렇게 해라, 등의 말을 원격으로 하고 있는 꼴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모든 걸 처리하고 견디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일일이 보고하며 다시 그 일들을 상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나는 지금 엄마와 아빠를 위해서 여기에 와 있고, 엄마와 아빠와 심지어 언니까지 돌보고 있는데, 그러느라고 나를 갉아먹고 있는데. 나는 누가 챙겨주지. 


내가 가족 때문에 힘들어할 때,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 때 내 옆에서 나를 돌봐주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울고, 쉬고, 위로받으면서 나를 지켰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내 옆에 없었다. 앞으로 계속 없을지도 몰랐다. 집에 오고난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그와 하루에 잠깐씩 연락하긴 했지만 시시콜콜 나의 힘든 점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 그런 짐을 나눠줄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떡하지. 죽을 것 같은 나는 누가 돌봐주지.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해야지. 내가 나를 지켜야지.



의사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엄마의 신경이 약한 것은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었기 때문의 가능성도 높지만, 유전적 이유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유전적 가능성이 있다면 나와 언니도 나이가 들수록 신경이 약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평소에 잘 관리해야 한다고. 


나는 우리 가족 내에서도 유난히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아이였다. 순간적으로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바로 두통이 찾아왔고 온갖 과민성 질환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엄마의 일을 알게 된 이후로 심하게 걸린 감기로 지금도 끊이지 않는 기침과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귀가 얇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었다. 


나는 내가 걱정됐다. 내가 나중에 엄마처럼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내 옆의 아무도 보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집어넣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내가 그와 앞으로도 함께한다면, 혹시나 그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를 우리 아빠처럼 만들 수는 없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이렇게 내 인생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뿐이다.


머리에 꽉 차버린 이 분노와 스트레스를 어찌하면 좋을까. 술을 마시고 싶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냥 술을 마시고 싶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갔다. 혼자 간단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몇 년 전에 우후죽순 생겼던 저렴한 맥주집들이 분명히 있는 줄 알았는데, 코로나의 여파 때문인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오래된 호프집에는 혼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로 향했다. 뭐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었다. 저 작은 학교에서 옳지 않은 일에 소심하게 반항하고 또 순응하면서 살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알았고, 저기만 벗어난다면 훨훨 날아오를 거라고 생각하던 나날이었다. 


내 시절에는 없던 체육관이 있었고, 작은 운동장의 철봉과 동상은 그대로였다. 12시가 넘으면 운동장을 돌거나 피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동상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처럼 조금 상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가 살던 아파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애는 이제 거기에 없었다. 아이를 낳고,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팥빙수 한 그릇에도 꺄르르 웃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외롭고 외로운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아직 근처에 사는 친구가 생각났다. 내가 한국에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외로움이 너무 사무쳐서, 누가 날 알아주면 좋겠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하지만, 나를 안아줄 누군가가 너무 필요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차를 타고 달려와 줄 것 같았던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바쁘겠지. 그 아이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겠지.


쓸쓸한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편의점으로 갔다. 


매운 닭발과 소주를 살까 하다가, 아무래도 한 병을 혼자 다 마실 자신이 없어서 청하를 샀다. 예쁜 패키지의 별빛 청하라는 술을 샀다. 처음 보는 술이었다. 내가 독일에 있는 사이에 나왔겠지. 세상은 정말 빨리 변하는구나. 내가 모르는 예쁘게 생긴 술이 나왔구나. 


닭발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편의점 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앞에 보인 건 ‘매장 내 음주 금지’라는 안내문이었다. 편의점에서 원래 술을 마실 수가 없나? 당연히 가능한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편의점 안에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항상 편의점 밖에 있는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데. 그건 야외라서 가능한 거였나? 밖은 영하의 기온에 살을 에듯 추웠다. 아무리 지금 내가 청승맞은 상황이라도, 이 추위에 밖에서 술을 마시는 건 좀 아닌 듯했다. 


이미 따뜻해져서 냄새를 풍기는 닭발과 별빛 청하를 까만 비닐봉지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엄마와 아빠가 없는 작은 방으로 곧장 향했다. 닭발과 술을 책상 위에 올렸다. 노트북을 열어 <그레이 아나토미>를 틀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내 눈앞에 모아 놓고 싶었다. 그러면 나를 조금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빛 청하는 생각보다 너무 달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쓴맛보다,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달아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술이 더 낫다고. 그게 이미 너무 써서 쓰라린 지금의 나를 조금 차분하게 해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간지럽히는 그 술을 혼자 계속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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