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로,아내로, 엄마로 살아온 인생 전반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나 찾아가기
“밖에서 이는 파도는 막을 수 있지만 내면에서 터지는 봇물은 감당하기 힘든 법이니까”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넘었다. 내 주위 이즈음에 다다른 사람들을 보면 무미건조하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내면의 성장보다는 부동산, 주식 등 물질적 성장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어떻게 노년을 편안하게, 재정적 어려움 없이, 세상의 변화 속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가슴이 뜨겁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 뜨거워지는 듯하다. 이 가슴속 불덩이는 계속 타오르는데 나는 지금 새장 속의 새처럼 살며 저 문을 부수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발화하여 새장 안에서 타 죽을 것인가, 아님 문을 박차고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로 쓸 것인가? 결정은 나의 몫이지만 미지의 길을 가기 전에 나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다시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부모님 말씀을 따르며 사는 순진한 아이였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였지.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며 계속 착하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정답인 것처럼. 그런데 착하다는 게 정말 좋은 뜻일까? 무엇이 착하다는 말인가? 지금 미디어를 보면 착한 가게, 착한 임대인 등 착하다는 말이 넘쳐난다. 값도 싸고 양도 많이 주는 박리다매 방식의 영업을 하고, 코로나로 인해 몇 달간의 임대료를 면제해주어도 일상생활에 무리 없는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도 좋겠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물가가 오르면 상품의 가격도 오르는 거고, 상권 좋은 곳에 입주수요가 높으면 임대료도 올라가는 거다. 힘들게 사는 예술인들의 무형의 자산을 재능기부로 몰아붙이지 말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일방 통행적인 사회가 정의한 정답이라는 말도 역방향으로 생각해보면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정답을 그냥 외우고 싶지 않다.
어릴 적 나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많은 곳을 이사 다니며 살았다. 그것을 어린 나에게 마치 여행 가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준비 없이 닥친 아버지의 전역과 이후 고향 대구에 정착하면서 어머니의 가출과 이혼, 대학 실패와 재수,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과 재정적 지원의 단절,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야 했던 직장생활, 도망가듯 결정한 결혼생활. 그곳 또한 안정적 삶을 가로막는 아버지라는 존재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도피하고자 선택한 미국 유학, 그리고 학위를 마칠 때 즈음 아버지의 세 번째 결혼과 함께 철저히 해체된 내 가족.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의지하며 외로운 인생의 여정에서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고 서로를 힘들게 하고 파괴적 존재가 되어 있다면 가족의 순기능을 상실했으므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각자도생 사회, 참 이기적이지만 현대사회를 잘 대변한 씁쓸한 말인 것 같다. 과거 우리 아버지, 어머니 시대에는 열심히 살면 잘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사회였으나 지금은 열심히 사는 것 만으로는 부족한 사회, 이미 사회 속의 차별과 차등이 고착화되어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힘없는 서민들은 허공에다 사이다 발언을 하면서 화를 삭이고 높으신 분들은 듣는 척하면서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에게만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계산을 튕기며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 살면서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각자도생 사회 속 기본 구성요소는 각자도생 가족일 테니 가족이 철저히 해체된 우리 집도 각자 알아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며 살고 있으니 잘 살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책을 내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조각조각 기억의 단편들을 글로 끄적거리고 있다. 뭔가 가슴속에 터질듯한 뜨거운 불덩이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언젠가 시한폭탄처럼 내 머릿속에서, 내 가슴속에서 터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나누면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고 하지만 어디 우리 사회가 그런 곳인가.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상대에게는 관대하지만 이해관계가 있는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면 그 부분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힘들어도 안으로만 삭혀야 한다. 삶에 있어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고 피라미드의 정점만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서의 삶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왜 우리는 내가 이룬 성과도 아닌 것에 울고 웃어야 하는 걸까. 우리 아버지는 00 대학병원 의사이고 어머니는 00 대학 교수이고 형은 서울대를 나와 00 전자에 근무하고 있고 하는 식의 내 잘난 가족 소개가 내 소개를 대신하는 사회. 그와 반대로 우리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시고 우리 형은 3류 대학 나와 취업을 못해서 백수로 있다는 말은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꺼내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하냐라는 질타를 받는 그런 사회. 왜 우리는 편한 것에만 귀 기울이며 불편한 사실에는 외면하는가. 왜 우리는 내 노력과 상관없는 일로 내 가치를 재평가받아야 하는 건가. 왜 우리는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나의 가족 때문에 가치가 상승하고 또 하락하는 걸까?
지난 내 오십 년의 세월 속에 나는 없었다. 그 시공간 속에서 그냥 물성으로만 존재했지 나의 영혼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다 지천명이 된 지금 나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무엇을 확인하기 위함일까. 인간이라는 여타 다른 영장물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능력과 축복을 받고 태어난 우리가 식물처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의 섭리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까. 희노애락오욕정을 다 누리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자 나답게 아닐까 라는 자문자답을 하며 남은 내 반의 첫 장을 도전하고자 한다. 오롯이 내가 되기 위해서
이 거대한 우주는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의미가 부여되고 자전축인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인생 1막보다 중요한 2막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 남은 열정을 짜내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주위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금까지의 내 길과는 달리 내 마음과 의지가 움직이는 곳으로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울고 짜며 동정심에 호소하는 신파극이 아닌 새로운 모험극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어차피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기에. 그리고 어지간히 착하게만 살아온 비겁한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