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다.
삶이 나를 시험하던 순간, 나는 멈추는 것을 선택했고,
그 멈춤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해 주었다.
2024년 3월, 나는 승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가족 돌봄 휴직을 신청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아버지의 위중하신 건강 상태였지만, 사실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고, 그 무너짐은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나를 안에서부터 붕괴시키고 있었다.
내가 모시던 과장은 부임했던 첫날부터 주무팀장 자리를 직원들 앞에서 약속했고 연말 정기인사를 앞두고 다시 한번 내게 그 자리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 내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간의 공로를 생각하면 그 말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약속처럼 들렸고, 나는 그것을 마음 한편에 '최소한의 기대'로 간직한 채 묵묵히 나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사가 발표되던 날, 주무팀장 자리는 내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전입 온 나보다 경력이 낮은 사무관이 차지하게 되었고, 해당 인사명령으로 인해 이중 플레이했던 과장의 실체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과장은 전입 오는 사무관에게 나에게는 근무성적 부서평가 1등만 주 '별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주무팀장 자리를 자신이 먼저 보장하고서는, 동시에 다른 이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내 마음은 단순한 실망이나 배신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조직에 대한 염증, 반복되는 내부 정치와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교차하는 그 흐릿한 경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고, 그래도 한 가닥 붙들고 있었던 내면의 끈마저 마음속에서 툭 하고 끊어져버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나는 정말로 이 조직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을 허우적거릴 것 같았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건강 악화는 내게 도망이 아닌 정당한 멈춤의 이유가 되어주었고, 나는 그 이유에 기대어 나 자신을 잠시 그 복잡한 바깥의 세계로부터 숨길 수 있었다. 그 멈춤은 표면적으로는 가족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나를 다시 돌아보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일터로부터, 세상의 요구로부터, 그리고 그 안에서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었던 나의 자존감으로부터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휴직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속도와 경쟁’ 없이 살아보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정해진 출근 시간에 맞춰 정신없이 움직이고, 누구보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삶에서 한 발 물러서자, 그제야 나의 숨결이 얼마나 가쁘고 얕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경쟁’을 학습받았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통해 줄을 세우고,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못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으며, 마치 그것이 공정한 평가인 것처럼 교육받아왔다. 어릴 때는 성적표였고, 사회에 나와서는 실적이었으며, 공직에 들어와서는 ‘승진’이라는 구조 속에 갇혀 버렸다.
둘 이상이 모이면 비교가 시작되고, 비교는 반드시 서열을 만들고, 서열은 우열과 권력지향을 낳는다. 결국 경쟁은 나보다 앞선 자를 의식하게 만들고, 동료를 경쟁자로 보게 만들고, 나보다 뒤처진 자는 무시하게 만든다. 이런 경쟁의 구조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방식이며, 거기서 밀려나는 순간 나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식의 암묵적인 메시지가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회가 우리 같지는 않은가 보다. 특히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독일은 히틀러 이후 경쟁과 우열을 세우는 파시즘적 요소를 없애고 개인적 자유와 기회균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교육 부분을 살펴보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인 아비투어(Abitur)를 통해 학생들이 대학 진학 자격을 획득하며, 이 시험은 상당수의 학생들이 통과하는 구조라고 한다. 이를 통해 원하는 대학과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인기 있는 대학이나 전공의 경우, 아비투어 성적이나 추가 조건이 반영되어 경쟁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체적으로 줄 세우기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진로에 맞춘 다양한 교육 경로를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말한다. 경쟁은 자유의 이름을 가장한 파시즘의 잔재일지도 모른다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서로를 비교하기보다 각자의 리듬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된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이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도 경쟁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비교를 통해 가치를 정하며, 승자가 아니면 실패자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 그 구조 속에서 나는 늘 긴장했고, 경계했고,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숨조차 가누지 못한 채, 내면의 외침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는 것을 멈춘 뒤에야 알아차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승진이라는 것을 원했을까. 과연 그것이 나에게 진짜 의미 있는 목표였을까.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얻지 못했을 때 이렇게까지 무너져야 할 만큼, 나는 그에 내 존재의 가치를 걸고 있었던 걸까.
답은 생각보다 빨리 떠올랐다.
나는 사회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세워왔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곧 내 인생의 ‘의미’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진 껍데기였고, 나는 그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내면을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조금씩 자각하게 되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외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안에 쓰인 한 문장이 나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이 모든 것은, 네가 창조한 것이다.”
그 말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든 책임 전가처럼 느껴졌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 말이야말로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내가 창조한 삶이라면, 앞으로의 삶 또한 내가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그 이후 나는 유전자키를 공부하며 나의 코드 중 하나가 ‘43번, 창조적 반란자’ 임을 알게 되었고, 그 코드의 의미를 마주하는 순간, 내 삶의 많은 장면들이 새롭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외부의 기준이나 사회적 성취에 깊은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기존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때로는 묻고, 흔들고, 다르게 살아내는 방식으로 주변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내 안의 목소리는 항상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흐름에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단지 내가 그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2024년 9월, 복귀를 앞두고 있었을 때, 나는 여전히 두려웠다. 그 조직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 마치 잃어버린 전장을 다시 밟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승진에 실패한 사람', '후배에게 밀리는 한심한 선배 ’라는 시선을 견뎌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말했다. “두려워도 괜찮아. 중요한 건, 그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두렵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복귀했고, 10년 넘게 사업부서에서 근무하던 것과는 달리 지원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사업부서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잦은 출장과 업무협의로 바쁘게 하루를 보냈겠지만 지금은 출장은 거의 없이 책상에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동안 했던 일리 정적이라 체질적으로 맞지는 앉지만 그래도 실무자로서의 과중한 업무는 덜어낸 상태에서 중간 관리자로 근무하는데 감사함을 느끼며 매일 일정한 호흡으로 나의 삶을 다시 정비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정비의 중심에는 내 몸과 마음,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명상을 통해 의식이 맑아지고, 깨어 있는 순간이 늘어갈수록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점점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깨달음은 나를 모든 것이 이미 충분하고 아름답다는 진실을 경험하게 한다. 그 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와 기쁨을 남기며, 나라는 존재를 다시금 믿고 사랑하게 만든다.
삼 년 넘게 웨이트를 하면서 몸을 단련하고, 드럼을 배우며 리듬에 몸을 맡기고, 유전자키를 통해 나와 타인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며, 이제는 정말로 ‘나의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은 결국 하나이기에, 건강한 몸을 만들고 가꾸는 일은 곧 내면의 균형과 연결되어 있고,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몸만들기에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음의 수련을 위해서는 'The Art of Contemplation'이라는 내면 성찰의 기술부터 시작해, 현재는 유전자키를 통해 더 깊은 깨달음과 이해를 쌓아가고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단지 음악을 즐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드럼을 직접 연주하며 나만의 밴드를 구성해 공연 무대에도 서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노년의 시간 속에서도 음악이라는 리듬 안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지금 나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쁨이다.
나는 이제 안다. 용기란, 두려움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용기란, 그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조용히 발을 내딛는 행위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이전보다 더 ‘나답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진심 하나만으로도, 나의 삶은 충분히 존엄하다.
나는 이제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아가지 않기로 했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시선에 맞춰진 삶은 언뜻 질서 있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내가 왜 살아가는지를 잊게 만든다. 그런 삶은 너무 오래 반복되면 익숙해지지만, 결국은 나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줄 세우기의 논리에서 벗어나 나만의 삶의 속도와 방향으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들을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그 길은 누가 만들어준 길도 아니고, 이미 닦여 있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매일의 선택으로, 매 순간의 감각으로 새겨나가는 나만의 길이다. 그 길에는 정답도 없고, 비교 대상도 없다. 나의 리듬으로 숨 쉬며, 나만의 직관을 따라 걸어가는 여정일 뿐이다. 때로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때로는 돌아가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나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 모든 움직임이 곧 나의 흐름이자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이 길 위에서는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고,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오직 내가 얼마나 깨어 있는가, 지금 이 순간에 얼마나 진심으로 존재하고 있는가가 유일한 나침반이 된다. 그리고 그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중심이 된다.
남이 정해주는 삶의 가치가 아니라, 내가 나의 존재를 통해 증명하고 정의하는 삶. 그 삶이 불안하고 고독할 때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그 길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가장 나답고, 가장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지금 나는 그 길 위를 걷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더 이상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미 충분하니까.
Courage doesn't always roar. Sometimes courage is the quiet voice at the end of the day saying, 'I will try again tomorrow.'
— Mary Anne Radm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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