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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나 생각

당신은 어떤 얼굴로 침묵했는가

침묵하는 자, 모두 유죄

by Rana



이 글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비겁함'이라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은 하지만 나서지 않고,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옳고 그름을 안다면서도 위험은 피하는 우리의 일상 속 선택들. 그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낸 오늘의 사회에 대해,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당신은 어떤 얼굴로 존재하고 싶은지에 대해 묻습니다.



사람이 비겁하다는 것을 처음 느낀 건, 한 사람을 향한 칼끝이 향했을 때였다. 그날은 모두가 침묵했고, 나는 그 침묵이 이토록 시끄러운 것인 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말은 많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등 뒤에서만 존재했다. 아무도 앞에 나서서 그 부당함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말로 정의를 포장했고, 입술 위에만 진실을 얹었다. 그들의 눈은 말하고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으며, 마음은 뜨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하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비겁한 존재인가?


사람들은 정의를 안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알고, 불의를 보면 화가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불의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순간, 자신에게 어떤 불똥도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의 뒤에 숨어 조용히 안도의 숨을 쉰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관심의 담장은 언제나 옳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런 광경을 우리는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짓밟히는 순간,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피했고, 손을 접었고, 나중에는 심지어 그 순간을 잊은 듯 행동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그들은 눈으로 귀로 들어온 정보를 가슴에만 묻어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돌아서서 자신들이 속한 끼리끼리의 안전한 무리 안에서, 본 것과 들은 것을 풀어놓는다. 말에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있어, 그 말 속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조금씩 그들이 속한 조직안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실제와는 괴리된 이야기들이 무리 속에서 퍼지고, 부당했던 한 사람의 진실은 점점 흐릿해져 간다. 정의는 여전히 말뿐이고, 행동은 여전히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침묵의 무게가 부조리를 더욱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도 말하지 않으니 괜찮은 것’, ‘다들 넘어갔으니 지나가도 되는 것’. 그렇게 비겁함은 공기처럼 퍼지고, 정의는 사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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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속에서 진실을 마주하며 깨달았다. 비록 선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를 갖기는 어렵다는 것을. 대부분은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제가 보여도 회피하게 된다. 자신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걸 두려워하고, 권력자에게 찍히는 걸 두려워하며, '문제있는 사람'이 소속된 조직에서 평가되는 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나는 권한이 없어." "내가 해봐야 바뀌는 게 없어." 그러나 실상은, 바꾸고 싶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고요한 일상 속의 안전함이, 정의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점점 비겁해지는 데에는, 단지 개인의 용기 부족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조가 크게 작용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 '튀지 마라', '윗사람에게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받으며 자란다. 문제 제기보다는 조용한 순응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갈등 회피가 성숙함으로 칭송받는다. 학교에서는 질문보다 암기를 더 중요시하고, 회사에서는 건설적 비판보다 상사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 된다. 이 사회는 체제 안에서 조용히 적응한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며, 제도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에게는 '문제적 인물'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정의보다 안정을 택하고, 용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누군가 칼을 들면 침묵하면서 권력자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그 칼을 비난하고, 누군가 목소리를 내면, 그 용기를 문제 삼는다. 정의는 그렇게 고립된다.


'남을 비난하면 세 명이 죽는다' 라고 한다. 비난당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 자신. 그래서 우리는 왠만큼 친밀하지 않으면 험담을 조심한다. 하지만 모두가 한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는 비난이 마치 놀이처럼 변한다. '그 사람은 다들 싫어하니까 괜찮아', '그 문제는 이미 끝난 이야기야'—이런 말들로 스스로의 무책임을 감춘다.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비겁해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비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만큼은, 그 순간 고개를 돌리지 않기를. 누군가가 부당하게 몰릴 때, 등 돌리지 않기를. 진실이 조롱받을 때, 침묵하지 않기를. 행동하는 소수만이 세상을 바꿔왔다는 것을, 당신이 기억해주기를.


역사는 늘 그 증거를 보여주었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거부했던 단호한 행동은 미국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불을 지폈고,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총탄을 맞고도 다시 일어나 여성 교육의 권리를 외쳤을 때, 전 세계는 침묵보다 말의 용기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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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그 용기의 선례는 존재한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유가족들과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한 단식 농성과 416연대의 연대는, 무책임한 침묵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 존엄의 불빛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아무도 함께 외치지 않을 때, 그들은 눈물과 절망 위에 진실을 놓았고, 그 진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흔들었다.


또 하나, 故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씨.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던 아들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온 그날 이후, 그녀는 고요했던 일상을 접고 거리로 나왔다.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기 위한 절절한 외침은 결국 '김용균법'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정의가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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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거대한 군중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단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 역시 아직 완전한 용기는 없다. 그러나 이제 등 뒤에 숨지 않기로 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침묵으로 안정을 택한 사람인가, 아니면 떨리는 목소리로도 진실을 말한 사람인가? 세상은 우리에게 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유예하며, 삶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그 유예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순간들에 대한 후회뿐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을 때, 당신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언젠가, 당신이 외롭고 억울한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지금의 당신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침묵할 것이라는 예감을, 이미 알고 있는가?




작가의 짧은 후기 나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 침묵의 그늘 속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더는 숨을 수 없었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게라도 균열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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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 : 사진: UnsplashLindsey LaM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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