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다녀간 날, 아내 얼굴에 봄이 왔다.

오랜만에 친정집을 찾은 딸아이와 아내의 대화를 곁에서 지켜보며,

by 랑세

딸아이가 영종도에 왔다. 우리가 이사한 뒤 처음 맞는 방문이다. 마침 사위는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중학생인 외손주는 수학여행을 떠난 덕에 오랜만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늘 바쁜 딸이 이렇게 느긋하게 다녀가는 일은 흔치 않기에,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뭉클하기도 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리저리 둘러보며 “좋다”는 한마디를 남긴다. 순간 마음이 놓였다. 괜히 어른처럼 체면치레로 한 말은 아닌 듯, 그 눈빛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내심 걱정스러웠던 터라 더욱 고마운 말이었다.


이제는 자식도 낳고, 제 가정을 꾸려 사는 어른이건만,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 같다. 기특하고, 착하고, 마음 씀씀이도 곱고. 무엇보다 엄마와 말하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똑 닮았는지. 말투도, 리듬도, 표정도, 심지어 손짓까지.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흐뭇했다.


픽업하러 가는 차 안에서도 모녀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깔깔 웃는 그 모습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운전석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세월은 참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아내도 나도 칠십을 훌쩍 넘겼고, 이제는 ‘중늙은이’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백세 시대라곤 하지만, 몸이 보내오는 신호는 솔직하고 분명하다. 그런 나를 보며 딸아이는 자꾸 건강이 괜찮냐고 묻는다. 얼굴이 좀 수척해졌다고 하고, 같이 걷다가 내가 조금 뒤처지기라도 하면 “아빠, 괜찮아?” 하고 돌아선다. 뭐랄까, 이쯤 되니 딸이라기보다 작은 주치의라도 된 듯하다. 귀찮다기보다 고맙고, 고맙다기보다 짠한 마음이 먼저 든다.


점심을 먹고, 동네 카페에 들러 또 한참을 이야기했다.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세 식구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여온 마음이 배어 있었다. 평소엔 아내와 단둘이 보내는 날이 대부분이라, 서로 말을 걸 일이 줄어들었고, 말투는 자주 퉁명스러워진다. 싸운 것도 아닌데, 어쩌다 대화가 오가면 어색하고 딱딱하게 흐르기 일쑤다. “이것 좀 해줘요.” 하는 말도, 목소리나 어투가 거칠어지니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마음이 불편하다. 말이란 것도 곱게 해야 입에 붙는 법인데, 평소에 말을 아끼다 보니 그마저도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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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우리 사이에, 오랜만에 딸아이가 등장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밀려 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민망할 정도로 속 깊은 이야기까지 죄다 흘러나오니, 옆에서 듣는 나조차 “원, 별 얘기를 다 하네” 하고 웃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오히려 “그럼, 엄마 하고 싶은 말 다 해. 다 들어줄게” 하며 장단을 맞춘다. 그 모습이 참 예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참 고마웠다.


한때 중2병으로 마음을 닫아걸었던 큰 손주 때문에 아내가 속앓이를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손주는 자식 하고는 또 다르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했던 말이다. 사춘기 손주는 귀엽고 사랑스럽다가도, 어느 날부터인가 말을 뚝 끊고 퉁퉁거리기 시작한다. 뭐라고 한마디 건네기도 어려워 답답해지고, 괜히 눈치만 보게 된다.

“내 새끼였으면 종주먹이라도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하며 웃는 아내에게, 나는 대꾸도 못 했다.

“그래도 아들과 딸이 속 안 썩이고, 효도했으니 그걸로 된 거죠. 손주한테까지 뭘 바라는 건 욕심이에요.”

그 말이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 내가 들은 어떤 말보다 단단하고 지혜로운 말이었다.


자식이 다 컸다고 해서 부모와의 대화가 줄어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커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말의 온도는 더 따뜻해지고, 의미는 더 깊어진다. 오늘 하루, 딸과 아내가 쉴 새 없이 나눈 대화는 흉을 보거나, 무언가를 논하거나, 대단한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말하고, 들어주고, 웃고, 맞장구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재미고, 정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오늘 밤, 모녀는 늦도록 소곤소곤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나는 그저 옆방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것이다. 그리고 며칠은, 아내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오래 남아 있겠지.


딸이 다녀간 하루, 집안에 봄기운이 돌았다. 고마운 날이다.


ps ; 딸, 잘 지내왔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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