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시절 독서실을 함께 다니던 친구와 나는 그다지 공부에 열심이지 않았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집중해서 공부를 했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산만한 고3 시절을 보냈었다.
일요일이면 새벽 일찍 일어나 국립도서관에 자리를 잡았지만 일찍 일어난 게 힘들어서 책상에 수그려 잠을 자고는 했고, 점심을 먹고는 슬쩍 대기표(待期票)를 받아 도서관을 나와 대중목욕탕에 가서 프로야구를 시청하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대기표를 들고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는 일은 드물었고 저녁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갔다.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는 부모님 말씀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루틴은 학력고사를 앞둔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아마도 그런 와중에도 친구는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내 성적도 향상되고 있었으니 그럭저럭 하는 마음에 더욱 그런 루틴을 유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해 대학입시에서 나는 다행히도 지원한 학교에 합격했지만 친구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같이 공부하러 다니던 친구가 입시에 실패를 맛보게 되자 나에게도 귀책이 있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마음도 잊고 친구의 재수생활 시작을 응원하자는 마음에서 함께 2박 3일간의 여행을 가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보호자 없이 친구끼리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입시를 끝낸 자식들이 머리 좀 식히고 오겠다고 하자 부모님들은 지갑 두둑하게 지원해 주셨지만 문제는 고3 학생들이 자유여행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계획도 없던 상태였던 터라 우리는 딱 고3 남학생의 수준에서 상상할 수 있는 곳으로 첫 행선지를 정했다.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의 '자연농원'이 여행의 첫 목적지였다.
한참을 이런저런 탈 것들을 타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고 그러는 동안에 자연농원엔 엄청난 양의 눈이 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하게 눈이 내렸으면 자연농원에서 용인 시내로 나가는 버스편이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우리는 결국 눈 덮인 논밭을 가로질러 용인 시내까지 한참을 걸어가야만 했다.
지금 와서 지도로 대략 계산해보니 눈 오는 어둑한 밭길로 거의 20리를 걸어야 했던 것 같다.
완전히 어두워지고서야 용인 시내에 도착하여 터미널 주변 모텔 방을 잡았지만 우리는 다음날 어딜 가야 할지 생각이 모아지지 않았다.
막연하게 수안보 온천 같은 곳에 가서 수영이나 할까 하는 얘길 나눴지만 하루 동안 겪은 낯선 지역에서의 불안함과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정이 부담스러운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수안보'로의 이동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낯선 환경 속에서 불안감을 견디며 여행을 이어가기에는 우리가 아직 어렸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내 둘이 십만 원 이상씩 받아 들고서 떠난 2박 3일의 여행을 하루 만에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타협한 것은 서울로 돌아가서 집 주변 모텔에서 하루 더 묵고 들어가자는 거였다.
집 근처 백화점에 들러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사고 어른 티 좀 내보자며 맥주를 사서는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역인 선릉역 주변에서 모텔을 잡아 술을 진탕 먹고는 잠이 들었다.
우리가 묵었던 해당 모텔이 대실(貸室)을 주로 하는 흔히 얘기하는 '러브호텔'이었다는 건 더 나이가 들고 알게 되었다.
진짜 여행의 기억은 반나절에 불과했던 2박 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날 낮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 2박 3일간 여기저기 여행 잘 다녀왔다고 허세 섞인 너스레를 떨었다.
참 사소하기도 하고 불편한 일들의 연속이었던 그때의 여행 기억이 아직도 꽤 생생하게 추억으로 남아있는 건 아마도 첫 번째 자유여행의 경험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경험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첫 월급, 첫 사랑, 첫 직장, 첫 해외여행 등등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사귀었던 모든 여자 친구들에게 첫 번째라고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던 다른 친구가 생각난다. 대학 시절 수시로 여자 친구가 바뀌던 친구 녀석은 난봉꾼이라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순수한 연애관을 강변했었다.
A는 첫 느낌이야. B는 첫 끌림이었고, C는 처음으로 좋아한 애였지... 등등으로 구분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수많은 이성 교제 중 그 누구에게도 첫사랑이란 타이틀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녀석은 아마도 '첫사랑'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살다 보니 인생 안에는 정말 다양한 첫 경험이 가득하다.
인생 속의 기억할 만한 순간들은 사랑, 이별, 결혼, 입학, 취업, 승진, 집 장만 등 커다란 이벤트만 있는 건 아니다. 소소하게는 처음으로 산낙지를 먹는 다던가 홍어를 먹어본 기억, 한라산에 올라본 기억 등 더욱 다양한 일에도 의미를 둘 수 있다.
첫 번째 경험이 주는 설레고 때로는 당황스러운 기분들이 삶의 여러 순간에 자리해서 다양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이 나이 드는 과정에 갖게 되는 선물 같은 추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을 앞으로도 기꺼이 겪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