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 소프트뱅크社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를 선보이며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 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음성인식 AI 플랫폼인 아마존의 Alexa를 탑재한 에코 스피커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고 국내외의 사업자가 경쟁 AI 플랫폼을 개발해 유사한 제품을 적극적으로 출시하던 터라 휴머노이드 로봇이 AI 기술과 결합된 가치를 제공하여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던 시기였다.
다양한 산업군에 속한 회사들이 AI 기술과 휴머노이드 로봇을 결합해 각사의 서비스 방식을 혁신할 기회를 찾고자 노력했고 그런 노력들은 마치 유행처럼 퍼져갔다.
우리 회사도 당시 휴머노이드 로봇의 제휴 사업화 기회를 살피고 있었고, 이에 대해 보고 받던 CEO는 우리 회사가 먼저 휴머노이드를 업무에 직접 활용해보자며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고객이 방문하는 매장에 휴머노이드 로봇을 배치하고 AI 음성인식 기술로 고객에게 상품 안내와 구매 상담을 수행하도록 해보자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하면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의 흥미를 유발해 집객(集客) 효과를 높일 수 있고 회사의 선도적 기술 리더십을 홍보할 수 있을 것이란 취지였다.
실행력이 강한 CEO는 당장 매장 관련 시스템을 담당하는 팀장에게 전화를 연결했고 본인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전화를 받은 매장 지원 시스템 담당 팀장은 갑작스럽게 CEO의 아이디어를 듣고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으며 아이디어의 핵심 포인트를 재질문했고 주문 사항을 정확히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곧 검토해서 보고 드리겠다는 정중한 답변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 후로 보름여가 지난 무렵 CEO는 다른 회의에서 일전에 지시했던 휴머노이드 로봇의 매장 활용 검토에 대해 보고 받은 결과를 공유해주었다.
지시받은 팀장의 검토 결과인 즉 CEO의 아이디어처럼 휴머노이드를 매장에서 활용하는 건 고객 흥미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다수의 고객이 동시에 상담을 진행하는 매장 환경 상 고객 동선 분리와 소음 관리 상의 이유로 AI 음성 인식 기술을 활용해서 상담을 진행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AI 음성인식 기술보다는 터치스크린 같은 방식을 이용해서 보조적인 상담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유용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즉 CEO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으니 대안을 고민해봤다는 걸 에둘러 설명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CEO의 아이디어에서 부족한 고려를 짚어낸 것으로 볼 수도 있어서 CEO가 내심 불쾌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어진 CEO의 반응은 검토 결과를 듣고 매우 흡족했다는 것이었다.
CEO 역시도 매장의 음성 인식 환경에 대해 내심 염려하고 있었고, 혹시나 담당 팀장이 CEO의 제안이라는 이유로 부실하게 검토하고 그냥 밀어붙이겠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CEO라고 해도 모든 일을 실수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주변의 부하 직원들이 CEO를 어려워해서 의중을 헤아리느라 정직하게 판단하고 일하지 않는다면 회사가 어떻게 되겠냐는 얘기를 덧붙여 본인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검토가 이뤄져서 다행이란 생각과 담당 팀장의 충실한 검토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CEO는 보고 결과를 공유해주면서 마지막으로 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당신들도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는 한 번쯤 직원이 정직하게 일을 하는지 확인 가능한 일을 맡겨보라고. 일부러라도 잘못된 일을 시켜보고 어떻게 판단해서 가져오는지 지켜보면 그 사람이 정직하게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어."
당시 CEO가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의 태도가 놀랍다고 느껴졌다.
진짜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아이디어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고도 지시해본 거라면 그의 직원을 다루는 스킬이 대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게 아니라 원래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음에도 해당 팀장의 합리적인 보고를 받고 생각을 고친 거라면 그걸 수용한 판단력과 그 역시도 계획된 일이었던 것으로 정리하는 모습이 용의주도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결국 매장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활용하려던 계획은 실무 팀장의 제안처럼 터치스크린 방식을 이용한 파일럿 개념으로 진행되었고 별도의 AI 스킬(skill)을 개발하는 일까지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파일럿 결과 회사는 그 당시 휴머노이드를 도입해봤던 다른 대다수 회사들의 경우처럼 대고객 업무에 휴머노이드를 활용하는 건 아직 이르다고 판단했다.
그 이후 최저임금 상승 등의 여파로 인건비 부담을 느낀 기업이 사람들이 하던 일을 기계에게 맡기는 경우가 증가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역할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니라 주문을 대신 받는 무인 터치스크린 키오스크 같이 단순한 기능의 기계에 맡겨져 있다.
흔히들 휴머노이드 로봇의 활성화가 지연되는 걸 '사람들이 인간과 닮은 로봇에 호감을 느끼다가도 어느 정도에 이르면 거부감과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고상한 이론보다 범용 휴머노이드 로봇이 가진 제한된 기능과 음성인식 AI 기술의 낮은 신뢰성 때문이라고 보는 게 당장은 더 합리적이란 생각이 든다.
미리 학습된 일정한 상황에만 사람을 대응할 수 있는 로봇과 함께 일하려면 로봇이 사람의 일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로봇을 모시고 일하는 상황이 더 많아지니 말이다.
결국 '21년 소프트뱅크社가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의 생산 중단을 결정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으니 휴머노이드 로봇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것 같다.
반면 CEO의 갑작스러운 검토 요구에 신중하게 응대하여 합리적인 결정을 유도했던 팀장의 경우, CEO의 테스트를 통과한 듯했고 그 후로도 맡은 역할을 넓혀가며 중용되었다.
결국 로봇도 사람도 그 쓰임새를 인정받기 위해선 누군가로부터 시험받게 마련이다.
어느 경우에는 공개된 기준과 절차에 의해 시험받게 되고 어떤 때는 본인은 시험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평가받기도 한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시험을 치르고 평가받는 일은 늘 이어지는 반복된 일상이다.
초기엔 공식 평가가 익숙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조직에 오래 있을수록 비공식적인 평가와 평판에 의한 판단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아지게 마련이다.
공식적인 평가를 받다 보면 뭐가 부족한지 뭘 더 노력해야 할지 그 방법이라도 알 수 있겠지만 비공식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라면 사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시험당한 본인은 어떤 이유로 결격이 된 것인지 심지어 평가를 받은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날 누가 평가한 것인가?"
"언제 평가한 것인가?"
"무슨 기준으로 평가한 것인가?"
"다른 사람과 같은 공정한 기준으로 평가한 것인가?" 등등 뭐라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유를 모르고 평가를 받아 그 결과가 맘에 들지 않는 경우라면 그 궁금함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경우를 겪더라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TV 속에서 가수들이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음악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누군가는 고민 끝에 대중의 니즈에 맞춰 음악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대중과 동떨어진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맞추려는 사람이 항상 성공하고 행복한 건가 생각하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대중의 판단이 항상 고정적이지 않다 보니 그걸 쫓는 게 유리할지 자신의 스타일을 잘 유지하다가 대중의 눈에 들어가게 될 기회를 얻을 지는 모를 일이니 말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대중적인 락앤롤의 시대에서 힙합이 주류인 시대로 변해가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중을 붙들고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물어볼 수 있는 가수가 없듯
조직의 평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언제 이뤄지는지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모르겠는 수시로 변하는 상사의 평가기준에 맞춰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무리하며 살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는 옳은 기준을 지켜가며 꾸준히 살아가야 할지는 개인이 가진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바에 따라 다가오는 평가된 결과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평가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