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의 시대

by 랜덤초이

"대 횡령 시대(大 橫領 時代)"


이런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한 뉴스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2022년이다.

이제 한해의 절반이 조금 더 지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잇달아 터지고 있는 횡령 사고를 접하다 보면 올해 과연 어떤 일들이 또 우릴 깜짝 놀라게 할지 모를 일이다.


수천억, 수백억, 수십억 원의 횡령 액수를 접하다 보면 현실감이 없어져서 오히려 남의 일처럼만 느껴지는 게 또 웃픈 상황인 것 같다.


횡령 사고가 터진 은행과 기업에 대한 뉴스를 보다 보면 "내부 통제가 부실했다.”, “관리가 소홀했다.”, “시스템이 미비했다.” 등의 갖가지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내부통제 시스템이 있더라도 그런 시스템을 운용하는 게 사람이라면 마음먹고 작정하는 한 시스템을 회피하는 게 불가능할 리 없다.


업무절차와 시스템이 정교하고 복잡할수록 보통의 사람들은 중간 과정을 알려하지 않고 시스템의 결과만 그대로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시스템이 복잡할수록 작정하고 남을 속이려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의한 일을 꾸미기 쉬워질 수도 있다.


영화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NG OF LYING)’ 에서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는 세상' 즉 '진실만을 말하는 가상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이 혼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코미디 영화이다.


마치 시스템이 완벽하면 누군가의 횡령이나 배임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들 얘기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사회에서 한 사람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더 쉽게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걸 실감 나게 보여준다.


사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도 고상한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업무절차와 시스템들이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적용되는 모습을 보는 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국회와 같이 잘 정비된 법률로 절차가 적용되는 곳에서도 갖가지 절차들이 손쉽게 형해화(形骸化)되는 걸 보면 일반 기업에서의 모습이라면 어떠할지 더욱 상상이 가는 바이다.


시스템을 강화할수록 시스템과 절차를 회피할 힘이 있거나 악용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불의한 일을 벌이는 게 더욱 용이해질 것이고, 그런 경우를 방지하려고 또 시스템과 절차를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다가는 항상 시간과 돈을 들여 사고(事故)의 뒤만 쫓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러니까 횡령 배임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단순히 시스템이 문제라고 결론짓거나 관리의 의무를 가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일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힘들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건 결코 아니다.


사실 어떤 사고가 터질 때에는 분명히 전조(前兆)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유사한 작은 사고와 사전 징후(徵候)가 선행한다는 것은 숱한 경험으로 인정되어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으로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같은 사고의 전조나 징후를 보아도 누군가는 그런 위험을 민감하게 인식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업에서 횡령과 배임 같은 사고가 예방되려면 불의한 위험을 인식하는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적절히 조직 내부에 있어야 한다.

마치 지하의 탄광 속에서 안전한 작업을 위해 유독한 가스에 먼저 반응해 위험을 알려주던 '탄광의 카나리아(Canary in a Coal Mine)'처럼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 속한 기업이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권한을 통제하고, 부서 간 정보의 벽을 쌓고,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않아 조직 내의 카나리아를 내쫓고 있다면 그건 다른 징조나 전조보다 훨씬 위험한 대형 사고의 시그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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