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을 추억하다

by 랜덤초이


식당의 메뉴판에는 음식의 이름과 가격이 적혀있는 게 기본이다.


더 친절한 식당이라면 음식의 사진을 같이 표시하여 더 많은 정보를 주기도 한다.
사진이 있으면 음식이 어떻게 조리되어 나오고 어느 정도 양으로 제공될지 감을 잡을 수 있으니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간혹 메뉴판의 음식 사진과 너무 다른 실제의 음식을 보게 되면 오히려 당혹스러워질 때도 있게 마련이다.




3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마지막 여행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다음날 귀국을 앞두고 에펠탑 광장에 관광을 나갔을 때 같은 비행기로 유럽에 도착했던 낯익은 사람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여행사를 통해 자유여행을 예약한 학생들이었고 40여 일간 각자 갖은 고생들을 해서인지 처음 봤을 때의 서먹함보다는 반가움과 동포애가 솟았다. 그들과 총 4명이 구성되어 귀국 전 유럽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남은 현지화폐를 털어 중국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에펠탑 광장에서 조금 걷다가 눈에 보인 중국식당에 들어간 우리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는 참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메뉴판엔 음식 사진이 없었고 메뉴명은 모두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으며 기대했던 한자(漢字) 역시 쓰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어로 음식 메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음식이 영어로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역시 전혀 매칭이 되지 않았다.

그때 눈에 띈 메뉴 설명 중에 “Sweet and sour pork”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달콤하고 신맛이 나는 돼지고기”라는 설명을 보자 흥분했다.
"그래 틀림없이 이건 탕수육일 거야."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배낭여행 중 자주 먹던 샌드위치에 비해 대여섯 배 정도는 비싼 가격이었다. 부담스럽지만 유럽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지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4개를 주문했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두 개의 접시에 나온 음식을 보고 우린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음식으로 치자면 그냥 제육덮밥이 두 접시 나온 것이다.

탕수육인 줄 알고 크게 기대했던 것처럼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진 요리가 아니라 그냥 기름에 볶아진 듯한 돼지고기가 흰쌀밥 옆에 조금 놓아져 있었다.


크게 실망스러웠지만 우리가 잘못 상상했던 것이니 일단 먼저 나온 두 접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남은 두 명은 다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앞서 받은 사람들이 절반을 먹도록 추가 식사가 나오지 않았고 조심스레 주인분을 불러 물어보았다.


그러자 우리처럼 역시 영어가 서툰 그 중국계 프랑스인 주인분은 두 개의 접시를 각각 번갈아 가리키며 정중하게 얘기해주었다.


“This is for you two and This is for you two”


우린 분명히 메뉴판에서 네 개를 주문했는데 2인분씩 합쳐 담아서 둘씩 나눠먹으란 얘기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영어는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불어와 한국어는 상대에게 아무 의미 없는 상황에서 클레임이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이 먼저 먹다 남은 접시를 share 하여 간신히 허기를 때우고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메뉴판에 그림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실수와 실망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손님의 방문이 잦은 곳에서는 메뉴에 사진과 외국어 표기를 병기하여 편의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10년 전쯤 근무했던 사옥이 위치한 서울 남산 근처의 소월길에는 근처에 힐튼 호텔이 있어서인지 외국인이 자주 방문하는 작은 식당이 있었다.


식당 창문에 붙어있는 메뉴판에는 음식 사진과 함께 영어로도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음식에 대한 설명을 의역한 것이 아니라 음식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해놓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불고기'는 'Bulgogi', '된장찌개'는 'Doenjang JJige' 식이었다.


그런데 또 웃긴 것은 '된장찌개'의 '찌개'는 'jjige'인데 '김치찌개'는 'Kimchi stew'라고 적혀있던 것이다.

음식의 영어 표기에 대해 주인장의 원칙이 무엇인지 너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왠지 모를 신뢰감 저하로 인해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건 피하게 되었다.


허술한 메뉴판 때문에 식당 음식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경우이다.




요즘까지도 횟집이나 중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보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횟집의 고급 횟감이나 중국식당의 전가복 같은 고급 요리 옆에는 가격이 적혀있지 않고 그저 '싯가'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메뉴판의 가장 기본적 역할인 가격 고지 기능을 포기하는 건 대체 왜 때문일까?


혹시라도 가격을 물어봤다가 반드시 주문해야 한다고 할 것 같아서 나는 한 번도 '싯가'를 물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저런 메뉴를 시켜 먹을까?"

"싯가 표시된 메뉴를 시키면 말해주는 가격이 진짜 믿을 수 있는 가격일까?"

"사람 외모를 봐가면서 싯가가 달라지는 건 아닐까?"

"주문이 뜸하면 음식을 만들 재료는 신선하게 가지고 있을까?" 등등 궁금한 질문이 한가득이다.




사실 자주 가는 식당에서는 대개 어떤 음식을 시킬지를 마음속에 미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 경우는 처음 방문하는 식당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메뉴를 시키는 경우에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처음 방문하는 식당에 갈 때도 스마트폰으로 식당과 메뉴에 대해 검색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메뉴판을 보며 상상하거나 실제 음식을 보고 당황할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지금은 스마트폰의 광학문자인식(Optical character recognition; OCR) 기능을 사용하면 쉽게 꼬불꼬불 외국어를 해석할 수 있다.


세상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메뉴판에 얽힌 소소한 추억은 퇴색되어 가겠지만

낯선 장소에서 메뉴를 보고 고르며 잠시 선택을 고민하는 동안에 느끼던 설렘과 재미는 사라지지 않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걸 미리 알고 조심해서 안전하게 고르는 것보다 우연하게 겪게 되는 상황 속에 생각지 못했던 메뉴를 골라도 어쩌면 충분히 맛있고 즐거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메뉴판의 음식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재고 준비하지 않아도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의외의 상황은 그 나름대로 겪어볼 가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 결과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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