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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누가 키우나

by 랜덤초이

최근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국민 메신저 앱 카카오톡의 장애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나 역시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카카오톡 장애로 인한 일상의 불편만큼이나 이번 사고와 관계된 회사의 임직원들이 겪고 있을 혼란과 고생 그리고 책임감 역시 무겁게 공감되고 있다.


사실 물리적 통신 네트워크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서비스 앱 하나의 장애가 무슨 큰일이랴 싶을 수도 있겠지만 카카오톡과 인증체계를 공유하는 수많은 생활서비스 앱들까지 영향을 미친 상황은 생각보다 큰 혼란과 혼선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심지어 나처럼 주말에 별 연락을 주고받을 일 없는 사람마저도 주말의 취미인 브런치 글쓰기를 하기 힘들었고, 한 해 동안 정성 들여 써 모은 90여 편의 글이 보이지 않아 노심초사했으니 다른 사람들의 답답함이야 어땠을까 싶다.


사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 이후로 카카오톡이 우리에게 준 편익을 열거하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처음엔 그저 좀 더 편하고 저렴한 문자메시지의 대체 서비스 정도였지만 사진과 동영상 공유의 편리함이 더해지고, 음성과 영상통화를 지원하고, 하트를 보내 게임을 함께 즐기고, 이모티콘과 선물하기가 더해지며 우리의 생활을 바꿔온 것이다.


어느새 택시와 대리기사를 부를 때, 주차를 할 때, 헤어숍을 예약할 때, 그리고 백신 접종을 예약하거나 증명할 때도 카카오톡은 우리가 그런 일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기획자와 개발자 등이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되풀이했을지는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은 사고로 인해 대중의 '관심과 환호'는 '비난과 책임추궁'으로 참 쉽게도 돌변했다. 3할 후반 타율을 기록 중인 프로야구의 스타플레이어도 포스트 시즌 결정적 타석에서 병살타를 치면 극단적 비난을 받기도 하니 어쩌면 지금 대중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선수 입장에서 그리고 기업 입장에선 야속한 기분이 들 법도 하다.

그래도 그런 상황마저 이겨내고 부담을 극복해낼 때 더욱 성장하고 존경받는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발전적인 결과로 해결되길 응원해본다.


어릴 적 서점에 가면 '최신 인기가요'라는 책이 있었다. 그 시절 유행하는 가요의 악보와 가사를 모은 책이 당시로선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였다.

공부하듯 책을 보며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가사가 외워지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다가 노래방이 생기고 가사를 보여주는 기계가 제공되자 어느새 사람들은 노래 가사를 외우는 것에 둔감해져 버린다.


또 전에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최소한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수첩'에 정성스레 메모해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주 쓰는 전화번호라면 외우고 다니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이름을 검색해서 전화하는 요즘에는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도 불필요하게 느끼게 되곤 한다.


그뿐 아니다. 아마도 90년대까지는 집집마다 자가용에 '도로교통지도책'을 한두 권씩은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모르는 장소로 차를 운전해서 갈 때에는 도로정보가 표시된 교통지도책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가다 서서 지도를 확인하며 초행길을 어려워했던 기억은 모두에게서 이미 잊혀버린 것 같다.


여러모로 생활이 편리해져 오면서 사람들은 쉽게 새로운 편리함에 익숙해져 간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편리하게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하나의 편리함이 생겨날 때는 소소하게 기뻐하고 어떨 때는 흥분하며 즐겼겠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어느 순간 그런 편리함을 너무도 당연하게만 생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누군가의 노력과 혁신 덕분에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도태되어간 또 다른 누군가들(예를 들어 가사집, 수첩, 지도책 등 사라진 것들)의 눈물과 희생 위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단 걸 생각해보면, 지금의 익숙한 편리함을 마냥 가볍게만 여길 수는 없다.


영화 '부당거래'에 나온 명대사로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말이 있다. 배우 류승범의 찰진 연기로 그 말투가 재밌기도 했거니와 대사를 통해 연상되는 각자의 공감되는 기억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사실 누군가 누리는 편리함이 각자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진짜 권리인지, 아니면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 사이에서 허용된 묵시적 호의인지 가늠할 수 있어야 서로에게 과도한 기대와 의무가 요구되는 난감한 상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적(예를 들면 개인정보 같은...)으로 또는 사회적(독점이익 같은...)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이미 저당 잡힌 덕에 그동안 편리함을 누렸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우리가 사용하는 거대 플랫폼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담보로 어떤 것에 의존해서 무슨 혜택을 누리는 것인지 비교하면서 현명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망우보뢰(亡牛補牢)'의 상황이긴 하지만, '소=플랫폼'의 가치는 인정해야만 합리적인 규제의 틀이 논의될 수 있고, 그래야 과도한 규제로 플랫폼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소 키우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저마다들 이래저래 말이 많아지겠으니 요즘 같으면 정말 소는 누가 키우냐는 한 개그맨의 유행어가 절박한 호소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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