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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과 바람

by 랜덤초이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10여 년 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남자 주인공 F4 중 한 명인 윤지후의 대사이다.

드라마는 급(級)이 다른 엄청난 초상류층(超上流層) 부잣집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주인공들의 차림새부터 라이프스타일까지 일반 시청자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즐기는 취미 역시 평범한 소시민들은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일상에서 가볍게 즐기는 일들로 묘사하고 있었다.


요트의 경우 개인이 직접 배를 소유하는 경우라면 그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그에 따른 세금과 유지보수 비용도 만만치 않아 극소수의 계층과 마니아들에게만 허용되는 취미란 게 일반의 상식이다.

사실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는 요트의 경우, 노를 젓지 않아도 되고 엔진이나 모터와 연료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니 흰 천, 바람 두 가지만 필요하다고 얘기한 건 그런 요트 운항의 특성을 얘기한 것일 테다.

하지만 엄청난 재력을 가진 그가 달랑 두 가지 필요조건을 얘기하기에 저 대사는 왠지 이율배반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며 허세와 낭만의 끝을 보여줬다.


근데 진짜로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요트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며칠을 항해하느냐에 따라 식량도 필요하고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릴 때를 대비해 배의 수리를 위한 공구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더해서 목적한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는 날씨에 어울리는 의복도 필요하고 여권이나 비자 같은 현실적 필수품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사실 '흰 천'과 '바람'이란 건 항해에 필요한 동력원을 설명한 것일 뿐, 그것만으로 어디에나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어쩌면 회사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명분'과 '뒷배(스폰서)'가 그것이다.

새로운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분'이 있고, 그걸 지지하고 밀어주는 '뒷배 즉 스폰서'가 있다면 특정한 일을 시작하는 건 쉽게 이뤄진다.

통상 스폰서가 되는 경영진이 직접 실무를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그들은 알아서 근사한 목적의 일을 시작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가진 사람을 찾으면 그에게 소임을 맡기게 된다.


예를 들어 “현재 시장 성장의 주된 전장이 되고 있는 디지털 플랫폼과 관련하여, OO영역을 신성장 목표로 삼아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가겠습니다.”라는 그럴듯한 명분.

그리고 “그런 명분으로 임기 중 성과를 보여주려는 경영진의 후원 그거면 시작은 충분하다.


하지만 항해가 '흰 천'과 '바람'으로만 완성되지 않듯 신규 사업도 '명분'과 '뒷배(스폰서)'로만 성공하기는 어렵다.

목적에 맞춰 필요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도 기민하게 수행해야 무동력 항해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듯

새로운 사업의 시도 역시 목적한 바에 맞춰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변화하는 환경과 고객 니즈에 기민하게 반응해야만 그나마 목적한 결과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명분에 천착하고 뒷배에만 의존해서는 시장이라는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게 냉정한 현실이다.


드라마 속 지후 선배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 '흰 천'과 '바람' 이외에 필요한 준비를 대신해줄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본인 입장에선 그 두 가지면 진짜로 충분할 수도 있겠지 말이다.


그런데 그냥 평범하게 저런 일을 맞닥뜨리는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말고도 준비할 일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니까 각자의 정확한 처지를 정확히 알고 그에 맞춰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따져보는 게 아마도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항해도 그렇고 사업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회사에서의 일이란 늘 시작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지만 끝낼 의무는 남게되는 법이었다.

폭풍 속에 조난 당하지 않으려면 시작할 때의 준비라도 더 철저하게 할 수 있게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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