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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Feb 21. 2023

침묵과 간섭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 傍觀者效果)’라는 용어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방관자(Bystander, 傍觀者)’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사람’이란 뜻이어서 ‘구경꾼 효과’라고 하기도 한다.


방관자 효과는 ‘제노비스 사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거 미국 뉴욕에서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라는 사람이 강도의 습격을 받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현장에서 수많은 목격자가 존재했지만 ‘내가 아닌 누가 신고하겠지’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주겠지’ 하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되어 실제 도움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제노비스가 살해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된 이유는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 도움을 주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책임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 責任分散)'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 때문인지 요즘 시대의 ‘응급상황 時 행동요령’에는
“처치자(處置者)가 119에 직접 전화를 할 수 없는 경우, 주변 사람을 지명(指名)하여 신고하도록 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거기 파란색 옷 입은 남자분 119에 전화 좀 해주세요.”

이렇게 특정인을 지목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무나 119에 전화 좀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란 것이다.




이 같은 내용들이 사회적으로 학습되다 보니, 회사에서는 ‘책임 분산’에 의한 문제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임직원과 조직의 역할을 가능한 세세히 정의하고 싶어 한다.

'누가 어떤 역할을 갖고 일하는지가 명확해지면 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얼핏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이런 방법이 나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경험한 여러 가지 사례 속에서 위와 같은 방식이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자주 봤었기 때문이다.


우선 R&R이란 것을 일단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 사후적인 책임을 묻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사용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 또는 자기 조직이 가진 R&R의 범위를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각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보다 좁은 범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 회사 전체 구성원의 R&R을 모두 모아놔도 회사에 필요한 전체 R&R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모두들 자기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있는 수준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한정 짓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니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역할이 방치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활동에 필요한 모든 R&R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미리 정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자세히 정의하려 해도 실제의 필드(field)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세세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설의 복서(Boxer) 마이크 타이슨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계획과 실제 상황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발언이다.


혹시 R&R을 빠짐없이 정리하여 그 역할을 수행할 조직이나 사람을 맵핑(mapping) 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는 없다.

해당 역할에 필요한 자원(resource, 資源)과 역량(capability, 力量)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R&R 지정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슈이기 때문이다.

적정한 자원과 역량을 가질 수 있게끔 지원하진 않은 체 책임만 부여하는 것은 몰상식한 책임 떠넘기기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얘기한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의 경우로 다시 생각해 보자면, 직접적으로 응급처치를 행하는 사람의 경우 당연히 해당 응급상황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나서야 한다.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 최적이고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의 필요한 교육을 받았거나 경험을 가진 사람이 나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응급환자(應急患者)가 발생하면 기내(機內)에 혹시 의사(醫師)가 있는지를 먼저 찾는 건 당연한 매뉴얼이다.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역할을 부여하게 되면 상황을 해결할 길은 요원하고 그저 희생양을 분명히 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또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역할을 맡겼더라도, 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지원도 함께 제공되어야 마땅하다.


'박망파 전투(博望坡 戰鬪)'는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해 모셔온 후, 제갈량이 참전한 첫 번째 전투이다.  제갈량을 영입한 유비는 그의 실력을 높이 사서 그에게 군사(軍師)로서 작전을 지휘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제갈량은 먼저 유비에게 그의 인장(印章)과 보검(寶劍)을 청(請)한다.


오랫동안 유비를 가까이서 모셔온 장군들이 제갈량의 지휘에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유비의 군지휘권을 이양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장군들을 지휘할 권위를 분명하게 이양받은 후, 제갈량은 그의 책략을 발휘하여 전투에서 승리해 가며 종국에 전쟁의 형국을 유리하게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회사 조직 안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책은 보통 ‘~을 위한 R&R을 명확히 했다.’ 또는 ‘해당 R&R을 수행하는 책임자를 교체했다.’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런 대응이 구조적(構造的)인 문제를 인적(人的)인 이슈로 치환하고, 당장 뭔가 행동을 취했다고 보여주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진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역량 있는 사람에게 제대로 역할을 부여하고 해당 업무 수행에 필요한 여건(與件)과 자원(資源)이 지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런 아름다운 결과를 보기는 참 힘들다.


그건 많은 경우 위와 같은 처방이 단지 책임을 질 사람만 분명히 하는데서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믿고 일을 맡겨서 결과를 보기보다 일단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고 뒤에서 의사결정에만 관여하려는 경우가 많아서인 것 같다.


일을 맡은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 경우라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기보다는 작은 이슈도 상사에게 보고하여 결심받으려 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방식이 일반적인 상황이 된다면 결국 의사결정은 더 늦어지고 책임이 분명해지기보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상황으로 변질되곤 한다.


분산된 책임으로 인해 방관자가 침묵(沈默)하게 되면 '제노비스 사건'처럼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방관자의 침묵만큼이나 '방관자의 간섭(干涉)' 역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스스로는 행동하거나 책임질 마음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책임을 지우고 행동을 요구하는 건 동료로서의 지원이라기 보단 그저 '방관자의 간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찾기 힘들다.


방관자의 '침묵과 간섭'보다는 조력자의 '조언과 지원'을 자주 볼 수 있는 환경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기업 조직 안에서 책임을 지우는 사람보다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 좀 더 많고 인정받는 문화가 탄탄히 자리 잡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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