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통신사의 데이터 사업기획팀장으로 임명되어 업무를 파악할 무렵의 일이다.
팀에서 관리하는 외부 업체와의 계약 중에는 某 유명 인터넷 기업으로부터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받는 계약이 있었다.
애초에 계약을 하면서 해당 인터넷 기업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5년 동안 콘텐츠 서비스를 공급받는 장기 계약을 한 상태였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문제는 계약 당시가 마침 이동전화시장이 일반 피쳐폰을 사용하는 시장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던 시기라는 점이었다.
점점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고객의 규모는 줄어들고 있었고, 인터넷 기업 역시 스마트폰 환경으로 변화하는 시장에서 구식의 서비스를 위해 별도의 개발 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난감해하느라 서비스의 퀄리티 역시 점차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계약을 하고 2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해당 서비스를 계속 공급받는 것은 특별히 사업적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터넷 기업 입장에선 연간 10억 원이 넘는 매출이 발생되고 있는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때문에 우리는 매년 무의미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회사 내부의 관리부서는 합의에 의한 계약 조정을 압박하고 있었고, 처음 계약을 체결한 주체였던 나의 상사는 본인이 입장을 바꾸기 어려우니 나에게 적절한 수정 합의를 추진해보라고 지시하였다.
내가 새로 부임하기 전에 해당 협상에 임했던 실무자는 상대측 실무 팀장의 무시무시한 협상력을 언급하며 내게 겁을 주었고, 나로서는 처음 팀장이 되어 맡은 임무를 깔끔히 수행하고 싶었지만 걱정도 그만큼 큰 상태였다.
약속된 협상 자리에 나가기 전에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본 나로서는 하나의 조건에 눈이 머물렀다.
“갑(당사)의 필요에 의해 서비스를 계속 제공받는 동안, 을(인터넷 기업)은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라는 조항이었다.
계약 문구의 문맥 상 ‘우리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상대 인터넷 기업은 서비스 계속 제공 의무가 없는 거고 서비스 제공을 하지 않으면 기존 계약의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상대 기업의 팀장을 만나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상황과 상대측의 입장을 주고받는 탐색전이 끝난 후, 아니다 다를까 평행선을 달리는 입장으로 인해 우리는 법대로 해야 하겠네요 라는 극한의 대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나는 준비했던 계약서 조항의 문구를 이야기하며, 회사의 입장을 전달했고 그 회사도 다른 몇 개 조항을 들어 기존 계약에 대한 수정 협의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결국 우리들은 각자 회사로 돌아가 회사의 법무팀에 서로의 주장을 인풋 하여 법적인 해석을 받기로 하고 그 후에 다시 만나 협의를 하자고 한 후 헤어졌다.
미팅 다음 날, 법무팀에 상황을 상세히 정리하여 검토 요청을 한 후에는 며칠간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흐르게 되었고 법무검토의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으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걱정은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나흘 후에 법무팀의 검토 결과를 받아 든 나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약서 검토 결과 상대 기업의 주장이 인정될 가능성이 커서, 계약 유지 바랍니다”라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양사 모두 계약 내용 상의 서비스 제공과 이용에 대한 실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금전적인 비용만 일방적으로 계속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 부당하다고 느껴졌지만 우리 회사의 법무팀도 상대 회사의 주장을 인정하는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제 없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애초의 계약이 미래의 환경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못해서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을 생각하니 나에게 일을 맡긴 상사에게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며칠을 허비하면서, 성격 있어 보이는 상대 기업의 팀장을 다시 만나 이런 소식을 전하려니 자존심도 상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가 지나도록 어떻게 연락을 할까 머리를 쥐어잡는 나날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졸이던 시간이 흐르던 중에 상대 기업의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전화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저희 법무팀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팀장님께서 하신 얘기가 맞다고 하네요. 제가 기존 계약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도록 안을 마련해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얘기를 상대방이 말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법무검토의 특성상, 우리 법무팀은 그쪽의 의견을 그쪽 법무팀은 우리의 의견을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그 이후 이어진 협의를 통해 우리는 연간 10억에 이르던 비용을 대부분 정리할 수 있었고, 나는 새로 맡게 된 업무를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은 아마도 이래서 있는 얘긴가 보다.
생각해보면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라고 하더라도, 어디에선가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란 것도 존재했던 것 같다. 지나치게 걱정하여 스스로를 해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낙관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안 될 일이다.
어떨 때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노력이 될 수도 있는 걸 경험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직장 생활을 하는 분이시건 아니면 다른 업무를 하는 분이시건 본인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대로 일이 안 풀리는 경험을 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그래도 한번 기다려보길 추천한다.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각을 통해서라도 당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