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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Jun 01. 2023

잘 기억하는 체질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의 별명은 E.T. 였다.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1980년대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 (The Extra Terrestrial)’가 세계적인 대히트를 치면서 E.T. 란 별명을 가진 친구는 어느 반에나 꼭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별명을 가진 친구들은 직접 만나보게 되면 대부분 왜 그런 별명이 붙었을지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E.T. 의 외양에서 유추되는 특징이 한두 가지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반장은 특히 E.T. 의 큰 두상(頭相)과 도톰한 볼,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많이 닮았기에 누군가에 의해 그런 별명을 얻었고, 본인 역시 특별한 거부감 없이 E.T.라는 별명에 익숙해졌다.


반장은 공부도 탁월하게 잘했을 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특히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러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변성기 전의 미성(美聲)으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부르면 쟤는 뭐 ‘리틀 엔젤스 합창단’ 출신인가 하는 기분이 들 수준이었다.


그래서 반 친구들은 다른 반 E.T. 보다 우리 반 E.T. 가 훨씬 오리지널과의 싱크로율이 높고 능력치도 높다라는 점에서 자부심도 느끼고는 했었다.


E.T. 는 그렇게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구들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으스대는 법이 없고, 예의 바른 성격이었기에 모든 선생님들께도 예쁨 받는 친구였다.


그래서 반장의 학창 생활은 그냥 탄탄대로일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인 것 같다.


하루는 무섭기로 유명했던 수학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와서 칠판에 서너 문제를 적어놓고는 임의의 번호를 불러서 불려 나온 학생들에게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키셨다.


모두들 자신의 번호가 불리지 않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해했고, 몇 명의 친구들이 불려 나갔지만 대개는 문제를 풀지 못해 꾸중만 듣고 자리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처음 칠판에 적어놓은 문제 중 유독 한 문제 만은 정답을 풀어내는 친구가 없었고, 선생님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안 되겠다는 듯 ‘E.T.’를 불러냈다.


“야 반장 이건 네가 나와서 풀어봐 “


친구들이 잔뜩 혼난 뒤에 칠판 앞에 불려 나간 반장은 웬일인지 선뜻 손을 움직이지 못했고 이내 곧 선생님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모르겠습니다.”

반장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뭐? 하하 네가 이 문제를 몰라? 장난치지 말고 풀어봐”

여유롭게 웃으며 E.T. 에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다시 독려했지만 반장은 여전히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선생님의 여유는 점차 당황스러움을 넘어 화를 내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야 네가 이런 문제를 못 푼다는 게 말이 돼? 너 지금 장난해?”

선생님은 몇 마디 더 화를 내며 본인의 감정이 고조되더니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E.T. 의 뺨에 따귀를 날렸다.


갑자기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지자 반 분위기는 금방 얼어붙었다.

공부도 잘하고 늘 밝은 성격의 반장이 별 희한한 이유로 과도한 체벌을 당하자 아이들은 굳어 버렸다.


수학 선생님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수차례 반복적으로 반장의 뺨을 때렸고, 반장은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체로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반장의 실력이면 당연히 풀 수 있는 문제인데도 일부러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라 단정 짓고 선생님을 무시한다며 폭력을 이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반장에게 폭력을 행사한 수학 선생님은 본인의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씩씩대며 수업을 일찍 끝내고 나가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정작 해당 문제의 풀이와 답은 알려주지 않은 채 나가버리신 것이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신 후 친구들은 E.T. 에게 다가가 “너 진짜 저 문제 풀 수 있는데 안 푼 거야?”라고 물어봤고 반장은 “진짜 모르겠어.”라고 답했다.


반 친구들은 아마도 수학선생님이 풀이 과정을 숙지하지 않고 수업에 들어왔다가, 내심 믿고 있던 반장이 풀이를 못하겠다고 하니 직접 풀어줄 자신이 없어서 당황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상황이라면 아이들에게 다음 시간까지 숙제로 해오라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갑자기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직접 맞았던 것이 아닌데도 당시의 상황이 기억에 생생한 것은 폭력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그 후로 혹시 E.T. 가 당시의 충격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힘들어했으면 어쩌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던 E.T. 에게 당시의 일을 물어보니 오히려 나보다도 당시에 있었던 체벌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트라우마 없이 잘 털어내고 살고 있는 E.T. 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망각이 얼마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그 당시의 기억이 나 스스로에게 있었던 일이라면 나는 아마 지금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선명하게 당시의 일을 기억할 것만 같다.

나는 체질적으로 잘 잊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이다.


친구들은 나에게 어쩌면 그렇게 예전의 사소한 일들도 잘 기억하느냐고 묻곤 한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경험한 일이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은 학창 시절의 공부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오래된 기억... 그중에서 좋은 추억과 감정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건 특기이자 축복 같지만, 어렵고 아픈 기억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건 반대로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선택적 기억상실증(Selective Amnesia)이란 게 있다던데, 그게 의학에 의해 조절가능한 시기가 온다면 한두 개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내고 싶기도 하다.


단,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라면 가해의 기억은 오래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게 공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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