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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May 31. 2023

기억할 이름

어느새 책을 읽는 것보다는 소장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게 된 나에게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Warfare)'라는 책은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이었다.


무려 1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동서고금의 많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심지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도 서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가 느껴진 책이었다.


특히 저자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1887~1976)'는 영국의 육군 원수이자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사령관이었다.

실제로 전쟁을 경험한 군지휘관이 전쟁에 대해 쓴 책이라는 점이 무척 흥미롭기도 하여 나는 이러저러한 기회로 결국 이 책을 소장하게 되었다.


책은 워낙 크고 무게도 나가서 들고 다니기 어려웠고, 집에 곱게 모셔둔 채 드물게 책장에서 뽑아 여기저기 펼쳐보는 수준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크기와 두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책장의 가치와 격을 높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소장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몽고메리 장군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로 불리던 독일의 롬멜 장군을 패퇴시켰단 사실 때문이다.

그는 항상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가였기에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병사와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하는 방침으로 확고한 승리를 거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평가가 마치 손자병법에 실린 '勝兵先勝而後求戰(승병선승이후구전)' 즉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길 준비를 갖춘 후 전투에 나선다.'란 내용과 겹쳐 읽혀서 몽고메리 장군에게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막연한 호감을 갖게 된 몽고메리 장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또 다른 장군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스타니슬라브 소사보흐스키(Stanislaw Sosabowski)',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자유폴란드군 제1 폴란드 공수여단장이었다.

자유폴란드군은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에 황급히 탈출하게 된 폴란드 군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영국에서 조직한 군대로 우리 역사 속의 광복군 같은 조직이었다.


소사보흐스키는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전쟁 투입을 준비하던 중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한 연합군의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투입된다.


마켓가든 작전은 연합군의 네덜란드 수복 작전이자, 역사상 최대규모의 공수강하 작전이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던 연합군의 자만으로 밀어붙여진 전쟁이었으나 독일군에 비해 두 배의 인명피해를 내고 반격당하는 참극으로 마무리된다.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병가지상사(勝敗兵家常事)라지만 지금까지도 몽고메리 장군이 해당 작전의 결과에 대해 비판받는 이유는 무모한 작전에 의한 참패의 책임을 힘없는 망명군의 장군인 소사보흐스키에게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정작 소사보흐스키 장군은  작전계획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도 필요한 대안을 제시해 가며 전력의 상당수를 잃는 어려움 속에 주어진 역할을 용맹하게 수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책임을 피하기 위한 몽고메리 장군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쓴 소사보흐스키 장군은 지휘관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한직을 거쳐 불명예스러운 제대를 하게 되었다.  


공산화된 조국 폴란드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영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다 눈을 감은 그는 사후(死後)에도 십수 년이 지나서야 그의 행적이 재조명되었고, 마켓가든 작전이 벌어졌던 장소인 네덜란드의 여왕으로부터 무공 훈장을 추서 받게 된다.


폴란드 출신의 역사학자인 마이클 알프레드 페스케(Michael Alfred Peszke)는

"하급자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고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The worst thing that a subordinate can do is to question orders and to be proved right.)"라는 말로 마켓가든 작전의 실행가능성에 의구심을 표명했던 소사보흐스키의 불운을 설명했다.



소사보흐스키가 겪은 희생양으로서의 지독한 불운은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후한(後漢) 말 원소의 모사(謀士)였던 전풍은 원소의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해 원소군의 대표적인 모사가 되었으며, 조조군의 순욱과 비교되는 뛰어난 재사로 평가받았다.


이후 원소가 조조를 공격하려 할 때, 전풍은 원소에게 지구전을 펼치고 기병을 운영해 성동격서로 조조를 지치게 하며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원소는 조조와 단기 전면전을 펼치려 했고, 전풍은 간곡하게 원소에게 재차 진언했지만 원소는 군기(軍紀)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원소군이 조조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장군들은 모두 이전에 전풍의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고, 전풍에게 "주공(主公=원소)이 이젠 그대를 중용하실 걸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풍은  "주공이 겉으론 관용이 있지만 속으로 의심이 많아, 만약 승리했다면 기쁜 마음에 나를 사면하겠으나 패배하여 날 볼 면목이 없을 테니 더 이상 살 희망은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 원소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소사보흐스키나 전풍의 경우처럼 전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사심 없이 정직하게 임무에 임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양이 되고 어떤 불운을 겪었는가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된다.


"상급자의 지시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갖는 건 불필요한 오지랖인가?"

"상급자의 지시가 사실이나 양심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누군가는 지혜로움으로 포장하며 상사의 지시에 거스르지 말고 순리대로 살라하지만,

히틀러의 시대에 학살에 부역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그들을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비록 그들이 살아간 시대(時代) 속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어려운 일생을 보냈지만 스타니슬라브 소사보흐스키(Stanislaw Sosabowski)와 전풍(田豊) 같은 사람들에 대해 다시 찾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유불리(有不利)에 대한 판단은 당연히 그 가치 기준이 다르니까 정의로운 행동에 반드시 유리한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건 이해한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이 의(義)보다 이(利) 만을 중요하게 본다면 그런 사회에서 사는 건 또 얼마나 힘들어질까 생각도 든다.


법정에서 이뤄지는 증인 선서에선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라고 증인의 의무를 기술한다.

그만큼 양심과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 아닐까 생각되고 필요한 가치기준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정말 외우기 어려운 발음이지만 '스타니슬라브 소사보흐스키(Stanislaw Sosabowski)'라는 이름도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가끔씩 찾아봐야겠다.

그의 진심과 그가 지지 않아도 되었을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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