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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Aug 19. 2023

어린 어른

해외 체류 중인 친구들의 일시 귀국을 기회로 친구들과 오랜만에 식사자리를 가졌다.


약속장소였던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위치한 작은 식당은 

손님이 횟감을 사 오면 주인장이 회를 떠서 간단히 상을 차려주는 곳이었다.  


친구들 모두 처음 들른 곳이었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이 퇴색시킨 옛 글씨체의 차림표며 낡고 기울어진 테이블과 의자까지, 

어린 시절 자주 가던 추억 속 동네 식당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의 식당에선 감자탕이나 파전 같은 저렴한 음식을 즐겼지만

수십 년이 지나 나이 들어 만난 우리의 저녁 테이블엔 여름의 대표 보양식 '민어'가 올려졌다.


즐거운 마음으로 연신 술잔을 돌리다 보니 어느덧 십여 개의 소주병이 쌓여갔고, 

친구들의 대화는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로 널 뛰었다.

사소한 옛날 추억 속의 연애담부터 건강에 대한 얘기, 그리고 작금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까지...


옛 추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오래된 분위기의 식당에서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안주거리와 대화의 소재를 경험하다 보니 문득 지금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 속에 서로들 그저 웃고 떠들기에 바빴던 어린 친구들의 모습과 

어느새 희끗한 머리를 하고 앉아 꽤나 진지한 얘기들을 나누는 중년의 아저씨들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에게는 마치 영화 속의 화면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 술잔을 나누다가 문득 서로의 자식에 대한 질문이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다. 

누구 애는 벌써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지, 또 누구 애는 아직 초등학생이라지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친구가 새삼스런 감상을 얘기했다.


"이야 우리가 고등학생 때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그때 우리 부모님들 나이보다 지금 우리 나이가 더 많아졌네..."


그 이야기를 듣고 계산해 보니 나 역시 그때 우리 부모님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어릴 적 보았던 부모님의 모습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사회를 잘 알고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어린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같고

내가 믿어온 사회의 기준이나 인간관계의 규칙이 어긋나 이리저리 부딪히며 살아 가는데

과연 당시의 부모님은 또 어떤 삶 속에 무슨 마음을 갖고 계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당신들도 지금의 나처럼 

자식들보다 나이만 많을 뿐, 각자의 어려움을 가지고 불안함을 숨기며 위태로운 순간순간을 버텨내고 있으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을 꾸린 어른이라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여리고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되는 어린 어른이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당시의 부모님 세대에 대한 연민 같은 감정도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세상살이에 익숙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어른이라는 건 얼마나 살았냐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goal 같은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든 계속 살아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것 같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어른이라는 표현은 우등상이 아니라 개근상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면 좀 편해지는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고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성실히 만 살아가면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사람이 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면 그럼 됐지 말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늘 다음 모임을 기약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담에 보자라는 막연한 말로는 아쉬운 것인지 

보다 구체적인 일정을 이야기해야 아쉬움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해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다음의 모임 기약은 1년 후가 되었다. 

마침 여름의 끝자락에 시간을 맞춰봤던 만큼 다음의 모임도 '민어'를 함께 하는 것으로 얘기되었다.


낭만적인 일이다. 

'민어'가 제철이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단 것은...


이참에 봄 도다리 모임, 가을 전어 모임, 겨울 넙치 모임도 생기면 좋으련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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