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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Jan 07. 2024

미달이 엄마를 위한 변명

아직까지 레전드로 기억되는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방학 숙제를 까먹고 내내 놀다가 개학 직전 밀린 일기를 써야 하는 미달이를 위해 가족회의가 열리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미달이 엄마 오미선(박미선 분)은 미달이 할머니 선우용녀, 그리고 이모들 (이태란, 송혜교)과 함께 식탁에 모여 앉아 밀린 방학숙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한다.


무슨 큰일이 난 듯 심각한 분위기로 작전 회의를 하면서 미달이 엄마는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가족들과 분담하려 물어본다.


“스토리는 내가 짤게. 글씨는 누가 쓸래?”


미달이 엄마가 질문하는 장면은 그 후로 "월급은 내가 받을게, 출근은 누가 할래?", "메뉴는 내가 고를게 계산은 누가 할래?" 같은 내용의 패러디로 양산되며 유행하였다.


패러디의 주된 핵심은 질문하는 사람은 쉬운 일, 질문받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폼 나거나 혜택이 되는 일을 선점하고, 남들에게는 힘들거나 노력이 필요한 일을 나눠주는 형태인 것이다.


극 중의 대화가 유머로 활용되고 짤이나 밈으로 유행하게 되는 것은 그 상황에서 보인 연기자의 표정과 말투가 재밌기도 했거니와 이처럼 패러디로 재창조된 내용들이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비틀고 극대화해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질문하는 사람과 질문받는 사람의 권력관계에 익숙하다.

경험 상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기에 그렇다.


일반적인 회사 조직에서 초임 리더들에게 가르치는 내용 중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좋은 리더는 스스로 일해서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남에게 일을 잘 시켜서 성과를 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조직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리더는 혼자서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이 가진 역량을 잘 활용하여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비틀어진 패러디에 재미를 느끼는 건 그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월급 수령'과 '출근', '메뉴 선정'과 '계산'처럼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서, 질문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역할을 비교함으로써 그런 상황을 풍자하고 그 과정에서 재미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극 중의 에피소드에서 미달이 엄마는 그렇게까지 불공정한 역할 분장을 하는 것 같진 않다.

브런치에 글 한 페이지 써서 올릴 때도 글이 잘 읽힐지, 말은 되는지 고민스러워하는 나로서는, 스토리를 짜겠다는 엄마의 선언이 그리 무책임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결국 할머니가 글씨를 쓰기로 하는 것은 미달이와 글씨체가 가장 흡사하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당 에피소드의 전후맥락을 이해해 보면 미달이 엄마는 꽤 중요한 역할을 책임지고 구성원들의 특기를 살려 필요한 역할을 분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패러디들이 인기를 끌고 유행된 과정에서 마치 미달이 엄마가 그런 얄미운 질문을 던진 사람으로 오해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공감하는 불공정한 역할 분담 때문에, 사람들의 불편한 마을을 투사한 못된 리더의 모습이 미달이 엄마에게 뒤집어 씌워진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철 지난 패러디를 접하게 될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미달이 엄마를 위한 변명을 해보자면 극 중의 미달이 엄마는 괜찮은 사람이란 것을 주장하고 싶다.

문제가 있다면 본인의 숙제를 하지 않고도 혼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가족들을 힘들게 한 미달이가 더 문제랄까? 


요즘도 일기 쓰기 같은 방학숙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창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자면 생성형 AI가 이미 일기도 써줄 만큼 똑똑해졌다는 것을 경험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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