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담화로 읽는 B급 사회생활얼
아직 쌀쌀함이 느껴지는 초봄 무렵 동헌(東軒) 한 구석에 두 사내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추위를 피하려 소매 속에 손을 깊숙이 감춘 체로 목을 움츠린 채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싶었다.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그래 그렇다니까"
"진짜 우리 고을에서 밀감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고?"
"그래 왜 예전에 우리 함흥부윤 하다가 한양 가서 나랏님 모시게 된 김대감이 그리 하랬다더군"
"아니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함흥 땅은 기후가 척박하고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때가 많은데... 거 밀감이란 건 따뜻한 아랫지방에서만 재배된다는 과실 아니오?"
"그렇지 아마..., 다들 그리 얘기하더군"
"아니 근데 왜 대관절 밀감 농사 타령이오. 그런 걸 재배하려고 밭을 엎으면 정작 겨울날 곡식을 충분히 마련하기 힘들어지지 않겠소?"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겠어, 지금 부윤이야 권세 높아진 김대감의 눈 밖에 났다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르니 그냥 장님인 셈 벙어리인 셈 하란대로 하려는 게지"
"아니 세상에 그렇다고 함흥에서 밀감을 기르라니..."
"부윤 영감은 아마 밀감 농사가 실패하더라도 관내 소작들이 기술이 없어서 그랬다 할 모양이오. 그리고 밀감을 심자니 밭이 줄어 공출(供出)이 어려워질까 봐, 나머지 밭에는 감자나 옥수수를 더 많이 심으랍디다"
"아니 땅은 더 줄이면서 더 많이 수확하란다고 감자와 옥수수가 그만큼 더 나오는 겐가? 왜 예전부터 새로운 특산물이 나온다고 나랏님께 자랑해야 한다며, 다른 나라에서 구한 귀한 씨앗을 뿌려본 게 한두 번이 아니잖소. 어렵게 씨앗을 구해 지극정성으로 경작을 해봤지만 씨앗도 쉬이 트지 않고, 혹시 씨앗을 틔워도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해 수확에 이르지 못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된 고초를 겪었냐 말이오."
"이보게 나도 그건 알지 말이오. 내 작년에 명나라 사신을 따라 역관에 머물던 통역사와 알게 되어 물어보니, 우리가 뿌렸던 특산물 종자(種子)라는 게 명나라에서도 다 운남(雲南) 지방 아래의 한해 내내 덥고 습한 지역에서나 뿌리내릴 수 있는 것들이었나 보오"
"아 그럼 우리가 농사를 잘못 지은 건 아닌 게로 군"
"그렇단 말이오. 근데 뭐 이런 이야기를 할래도 이미 나라님께 자랑한 일이라고 기어이 묵살하지 않소"
"큰일일쎄 이러다 또 우리만 욕을 보겠소. 우리가 한번 진언(進言)을 드려야 하나?"
"그런 말 말고 일단 버텨야지 우리가 뭐 힘이 있나 더한 일도 있다는데"
"무슨 말이오 그건"
"저 윗 고을에 그 해류지(海流地)가 있지 않았나"
"그렇지 한양의 이대감 댁에서 소작주던 땅 말이지? 거긴 벼농사짓다가 바닷물이 역류하여 소금기 때문에 농사짓기 어려워지던 땅 아니오? 게다가 오랑캐의 습격이 잦아서 농사가 어려운 곳 아니오?"
"그 땅을 우리 부윤이 십만 냥에 샀다더군"
"아니 그런 쓸모없는 땅을 왜? 그 땅은 잘해야 일만 냥도 안 할 텐데?"
"아마도 예전에 벼농사가 크게 될 때를 기준으로 생각한 모양이오"
"아니 그래도 지금 사정이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 텐데 왜? 이대감도 몇 년 전 그 땅을 팔려다가 무산되었지 않나"
"아마도 이번에 거간을 잘못 쓴 모양이오, 거간을 섰던 자들이 이대감 측과 뭐가 있는가. 벼 수확량을 부풀렸다더군"
"아니 그게 가능한가?"
"그러게 말일세. 근데 워낙 거래를 서둘러 무리수를 두다 보니, 사실을 아는 자들도 제대로 정확히 얘기를 하지 못했던 모양일세"
"아니 그럼 그 땅을 사서 어쩐다오?"
"어쩌기는... 우리 같은 향리에게 소작들을 붙여 돈 들인 만큼 이윤을 만들어내라고 하겠지"
"아니 그런 염분 많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겠나? 군졸이라도 배치하여 안심하고 농지 정리라도 할 수 있게는 해준다던가?"
"그런 게 뭐가 문제겠소. 우리 부윤은 그냥 땅을 넓힌 것 자체로 일단은 만족스러울 거요."
"그래도 이제 농사지어 결과가 나오면 십만 냥이나 준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소?"
"세전만 꼬박꼬박 바치면 그 땅에서 나는 이윤이든 아니면 어디 딴 데서 나오는 이윤이든 상관없을 테지"
"제길 헐... 그럼 또 농사짓는 소작들과 쪼아 댈 우리만 고생이겠네"
"나랏일을 하는 분들이 저리 명분만 내세우고, 실상에 무관심하니 어찌할꼬"
"어쩌긴 잘 알잖소. 세월이 지나가면 남은 사람들이 다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법이란 걸"
"예끼 이 사람아 저 아래 '애무시' 땅에선 사과 과수원이 있는 산 중의 땅에 논을 만든다고 물을 대다가 감당이 안되어, 결국 과수원도 논도 안 되는 땅이 되었다지 않나. 결국 농사일하던 이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더 산속으로 화전을 일구러 쫓겨갔다지 아마. 그것도 다 땅도 모르고 농사도 모르는 그곳 부윤의 고집 때문에 그리된 게 아닌가"
"두고 보게 그 또한 뭔가 근사한 이유로 포장될 걸세"
"어찌 세상이 이리 부조리한 지 그냥 대놓고 도적질 하는 자는 한두 명에 해를 끼치지만, 이런 식이면 그냥 열심히 일하는 많은 양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 아닌가"
"아서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지 않는가, 굳이 그런 말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이건 뭐 더 어찌할 도리가 없겠군 그래”
"우리 같은 향리들이야 뭐 그냥 하루하루 무사하게 지내는 게 그 나름의 행복이 아니겠나?"
"난 그런 상황이 너무 분하고 갑갑하구려.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이리 많은 사람이 어렵고 험한 길을 걷고, 결국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유로 책임지고 밥줄이 끊기거나 형을 받게 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란 말인가?"
"글쎄... 자네 마음을 이해는 하네만, 자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일세"
"다들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 흘릴 날이 멀지 않았군 그래...
哀淚無遠 이구려... 哀淚無遠..."
함흥 지방에 유행처럼 전해지는 지역 토착 사자성어 애루무원(哀淚無遠)은 이상과 같은 일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직역하자면 '애통한 눈물을 흘릴 일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대로의 환경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하며 스스로는 생각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조적으로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하다간 직역한 결과가 닥쳐올께 뻔한데도 말입니다.
※ 이상의 글은 허구로 창작한 내용이니 진짜 어디가서 사자성어라고 쓰시면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