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의 달인

by 랜덤초이

한자(漢字) 문화권에서 햇수를 세는 방식인 기년법(紀年法) '간지(干支)'는

천간(天干) 10개(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지지(地支) 12개(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조합해 순서대로 사용한다.


10과 12의 최소공배수가 60이니까

똑같은 간지를 가진 해가 돌아오려면 60년의 주기(週期)가 걸린다.

그래서 간지(干支)는 육십갑자(六十甲子/ sexagenary cycle)라고 부르기도 한다.


똑같은 간지로 표현되는 해는 60년마다 돌아오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특정한 간지의 해를 다시 경험하는 건 많아야 두 번에 불과할 것이다.




올해('25년)는 육십갑자의 마흔두 번째 순서인 을사년(乙巳年)이다.

아직 환갑을 넘기지 않은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을사년을 처음 경험할 텐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억에 '을사년'은 아주 익숙하게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년은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주권 침탈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해라서 사람들의 기억을 넘어 DNA에 까지 '을사'라는 단어가 새겨진 게 아닌가 싶다.


1905년 을사년,

대한제국은 일본과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조약의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은 지금까지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으로 불리며 그 악명이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한 갑자가 지난 1965년 을사년에는

많은 국민들의 반대 속에서도 경제부흥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식민지 시절의 청구권 문제를 다룬 한일 국교정상화 합의가 있었다.

이런 과정들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을사년은 그 시기를 직접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해가 되었다.




일정한 주기(週期)로 반복되는 시간이 특정한 경험과 결합되면

다시 돌아온 해당 시기에는 과거의 경험이 상기되어 기존의 기억을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벚꽃 피는 계절이 오면 '장범준'의 '벚꽃엔딩'을 찾게 된다.

가수 '별'의 '12월32일,'이용'의 '잊혀진 계절' 노랫말에도 특정 날짜가 표현되었기에, 주기적으로 그 시기가 돌아올 때면 사람들의 기억에 다시 상기되고는 한다.


그래서 나 역시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그리고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일에

그 사실을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특별한 시기를 결합하여 리마인드 시키고 싶다.


2018년 회사는 기업인수를 추진하고 있었다.

인수를 담당하던 책임자들은 이런저런 장밋빛 전망으로 인수 효과를 포장해서 기업인수를 밀어붙였다.

이미 분명하게 확인된 인수대상 기업의 위험을 감추려고 수치를 조작하면서까지 허위 보고를 한 결과

이듬해 기업인수는 불의한 책임자들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 많은 기업 인수를 추진한 책임자들은 인수계약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허무맹랑한 전망으로 위험을 가려서 기업인수 계약을 맺곤, 그것 만으로 큰 성과라도 되는 양 개인의 커리어를 포장하여 앞 다투듯 경쟁적으로 회사를 나간 것이었다.


이제 와서 확인된 인수기업의 가치는 처음의 부풀려진 가치평가 대비 1/10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 역시 여전히 암울하지만, 어차피 기업인수에 책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회사를 떠나버렸고 스스로의 책임에 대한 기억도 지운 듯하다.


누군가는 제대로 된 검토도 없이 덜컥 인수를 합의했고

다른 누구는 인수결정을 합리화하려 기업가치를 속였고

리스크를 살펴야 할 누군가도 눈치껏 보조만 맞추며 맡겨진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위세가 두려워 알면서도 침묵으로 방조한 사람들에게 껍데기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자신들의 성과를 포장해서 영전했던 그 사람들은 마치 '처세(處世)의 달인(達人)'처럼 보였지만

무술년(戊戌年)에 있었던 그 일의 결과로 인수된 기업은 아마도 다음 무술년(戊戌年)에는 기억에 조차 남아있기 힘들 것 같다.


엄청난 현금을 들여 지속가능성이 의심되는 회사를 인수한 결과는
이제와 피인수기업뿐 아니라 인수기업 모두의 임직원에게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의 부담만 남았다.


눈에 보이는 뻔한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남아 있을 후배 동료들에게 책임을 미룬 체 거짓 성과만 뽑아먹고 달아난 그들은

'처세의 달인'이 아니라 '무술(戊戌)의 달인'에 불과하다.


무술년(戊戌年)에 일을 내고 아난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부실(疎而不失)이라는 말이 있단다.

무술의 달인 그들에게 언젠가 하늘의 그물이 닿을 날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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