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請託)과 촌탁(忖度)

by 랜덤초이

"청탁(請託)"은 '청하여 남에게 부탁한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패 사건이 보도될 때 자주 함께 듣는 단어이고,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청탁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까 '청탁'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청탁 그 자체로는 나쁜 뜻이 아니다.


어울려 사는 인간 세상에서 남에게 청하여 부탁할 일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회 통념에서 보았을 때 남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서 생각해야 하는 나쁜 청탁에는 '옳지 않은'의 뜻을 가진''부정(不正)'이란 두 글자를 앞에 붙어야 한다. 즉 '부정청탁' 말이다.


약칭 '청탁 금지법'의 풀네임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엄연히 부정한 청탁을 막아야 하는 것인데 왜 '부정청탁 금지법'이 아니라 '청탁 금지법'이라고 줄여 얘기하는 건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예전에 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넘버 3'라는 영화에서 극 중 열혈 검사인 최민식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X 같아 하는 말이 뭔지 아냐?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거야. 정말 X 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X 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같은 구조의 비유는 아니지만 그런 영화 속 대사 같은 비슷한 기분이 들기는 한다.

"그래 솔직히 청탁이 무슨 죄가 있어? 부정한 의도를 가지고 부정한 방법을 통해 청탁하는 게 문제이지."


청탁과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이면서 청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본래의 뜻과 다르게 부정적으로 오해받는 단어가 있다. 바로 촌탁(忖度)이다.


원래는 시경(詩經) 교언(巧言) 편의 "타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린다.(他人有心 予忖度之)"에서 비롯된 좋은 뜻의 단어인데, 일본에서 정치인과 연계된 부패 스캔들과 함께 회자되면서 아주 부정적인 뜻으로 인식된 경우이다.


일본에서는 손타쿠(そんたく)로 발음하며 '상대방이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스스로 알아서, 분위기와 전후 맥락을 짐작해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흔한 표현으로 ‘알아서 모신다/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직장에서도 촌탁의 경우는 아주 자주 볼 수 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보고를 지시할 때에 상사의 마음속에는 본인의 이익에 따라 이미 원하는 바를 감추어 놓고 필요한 답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걸 잘 헤아리지 못하고 사실대로 판단해서 입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경질되거나 좌천되는 경우가 생기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뭐 알아서 촌탁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다.


회사뿐 아니라 나라의 정치와 관련된 영역에서도 나의 생각이 아닌 진영의 생각, 조직의 이익에 따라 입장과 말이 바뀌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못해 그렇지 않은 경우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청탁과 촌탁 두 단어 모두 원래의 유래에서는 좋은 뜻이거나 적어도 나쁘진 않은 단어인데 이렇게 부정적 생각과 연결되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동안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정한, 옳지 않은 생각으로 청탁하거나 촌탁 하지 않는다면 이런 단어들이 원래의 가치를 지키며 우리 삶 속에서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청탁이나 촌탁이란 단어가 쓰이는 인간관계에선 누군가는 더 우월한 지워에 있고 반대로 누군가는 을의 지위에 있는 경우일 테니 옳지 않은 목적과 방법을 배격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청탁하는 사람보다 청탁받는 사람 그리고 촌탁을 눈치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조할 만한 에피소드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과 관련해 채용 청탁에 관련된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과거에도 취업이 아주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취업을 위한 권력자들의 채용 청탁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채용 청탁을 받은 정주영 회장은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단, 1차 영어시험만 통과하면 말이었다. 그러고는 영어 시험을 아주 어렵게 출제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청탁한 권력자에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어렵네요'라고 얘기하면 청탁한 사람들도 뭐라고 말할 명분이 없어 포기했었다고 하고, 혹시라도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런 사람은 청탁이 아니라도 일부러 찾아서 뽑아야 할 사람'이라며 흔쾌히 입사시켰다는 것이다.


을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상황을 정말 현명하게 극복한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창의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을 좀 더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나 역시 그런 상황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자주 경험했지만, 잘 극복한 사례도 존재하는 걸 보면 부정한 청탁과 부정한 촌탁에 대항하는 것은 여전히 노력해볼 만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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