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강요하는 사회

by 랜덤초이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가 의전서열 1위, 야당의 당대표는 8위이다.

의전에 맞는 대우를 받으며 존경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는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지난 몇 달 사이에 현직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구치소에 갇히고 다시 석방되는 모습을 보았고, 야당의 당대표가 12개 혐의로 다섯 개의 재판에 출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어쩌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상상하기 힘든 초유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참으로 답답한 마음이다.


올초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후, 세계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갖춰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새롭게 전례 없는 일들을 경험하다 보니 나라 걱정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이 언제쯤 해소될 것인지 기약조차 없다는 것이다.

워낙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아지고 모든 갈등이 헌법재판소와 법원 앞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으니,

이건 마치 변비에 시달리면서 폭식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세상을 살며 겪는 모든 일들이 다 뭔가를 배워가는 이어진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대체 뭘 배우는 과정일까 생각해 봤다.

‘정의는 승리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런 말들은 참 좋은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람에 따라 성향에 따라 같은 현실도 다르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시국이기에 뭘 배웠다고 생각하기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니 분명히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은 있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지금 상세한 법지식에 대한 공부를 강요받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특히 헌법, 형법, 형사소송법 쪽에 치우쳐 잡지식이 쌓이고 있는 셈이다.


만약 요즘 같은 일이 없었다면

계엄의 요건이 뭔지, 내란죄의 구성요건은 뭔지, 무죄추정과 독수독과 원칙은 또 뭔지… 들어볼 기회나 있었을까?

항소-상고-항고는 어떻게 다른지, 폐문부재, 감치명령, 파기환송은 대체 어디다 쓰는 사자성어(?)인 건지 관심이나 있었을까?

파기자판은 또 뭘 파는 자판기인가?


법학 전공자에게나 익숙할 용어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듣게 되니 법률가 출신의 정치인들이 우리나라 국민의 법 지식수준을 훌쩍 성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무슨 영역이든 새로운 지식이 쌓이는 것은 좋지만,

지식 쌓이는 것보다 스트레스 쌓이는 게 훨씬 더 크니 이건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하다 하다 국민들이 법원 판사의 이름과 성향을 궁금해할 정도가 되면 되겠는가 말이다.


예로부터 '법 없이 살 사람'이란 평가는 특정인을 긍정적으로 칭찬하는 의미였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 없이 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 사고도 갈등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사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진짜 지금 시대에 필요한 건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를 저런 잡다한 법률용어가 아니라, 상식선에서 판단하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여러 법지식에 노출되다 보니 내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일 중에 전혀 잘못 알고 있는 일도 있었다.


만약 회사의 CFO가 재무적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해서 회사에 크나큰 손해를 끼친다면 무슨 죄로 벌해야 할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당연히 할 일을 하지 않아서 피해를 만든다면, 나는 당연히 이를 직무유기죄로 다스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알고 보니 형법 122조에 정의된 직무유기죄는 공무원 만을 그 처벌대상으로 한다.


제122조(직무유기)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그러니까 일반 사기업의 CFO라면 직무유기죄로 고발할 수 없는 것이다.

공무원이든 사기업이든 명확한 책임이 부여된 대상이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왜 직무유기는 공무원만 대상으로 할까?


하지만 다행히 법체계를 고민한 사람들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다른 처벌조항도 만들어뒀다.

그게 바로 배임죄이다.


제355조(횡령, 배임)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형법 상 배임죄는 사기업의 직원에게도 적용된다.

특히 배임행위가 업무상의 임무에 위배하여 이뤄진 경우 양형은 그 두 배 이상으로 높아질 수도 있다.


제356조(업무상의 횡령과 배임) 업무상의 임무에 위배하여 제355조의 죄를 범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무시무시한 건 여기서 다가 아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약칭: 특정경제범죄법)에 따르면 배임죄로 연결된 이득액수 규모에 따라 처벌은 무기징역까지도 정의된 것이다.


제3조(특정재산범죄의 가중처벌) 「형법』...., 제355조 (횡령: 배임) 또는 제356조(업무상의 횡령과 배임)의 죄를 범한 사람은 그 범죄행위로 인하여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한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의 가액(이하 이 조에서 "이득액"이라 한다)이 5억 원 이상일 때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한다.

1.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이득액이 5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일 때: 3년 이상의 유기징역 제1항의 경우 이득액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을 병과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니 다시 지금 현실의 사회갈등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유죄 판정(특경법 상 배임) 시 '무기징역'을 걱정해야 할 야당 대표와

유죄 판단(내란우두머리) 시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걱정해야 하는 대통령


캐삭빵으로 이어진 이 갈등의 끝은 과연 국민에게 희망적인 결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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