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시절 운 좋게도 그룹 연수원 교육 참여 우수자로 뽑혀 10박 11일 정도 미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97년 IMF 직전이었기에 그런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내가 다녀온 이후로는 외환위기가 닥쳐 더 이상 회사에서 운영하지 않는 제도가 되었다.
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복학하던 해에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해외를 경험한 적이 없었고, 특히 미국은 갱스터 무비를 많이 봐서인지 유럽에 비해 왠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출장은 기쁘기도 했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미국에 대해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된 데는 당시 우리 임원분의 역할이 컸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의 임원분께서는 LA에 위치한 국내 기업의 미국지사장을 역임하고 우리 회사에 스카우트되신 분이었는데, 신입사원이 미국 출장을 간다고 하니 걱정도 되고 도움도 주시려는 생각이 드셨는지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회의 탁자에 앉아보라고 하신 후, 본인의 책장 안에서 책을 하나 꺼내오셨는데 책인 줄 알았던 것은 펼치고 펼치니 커다란 지도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만 있으면 지도도 검색이 되고 차 안에서는 내비게이션으로도 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종이로 된 지도가 필요한 것이 당연했고, 해외에서 운전을 해야 하는 경우라도 생기면 운전자 옆 조수석의 동료는 지도책을 보면서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LA 지역을 크게 펼쳐놓고 내게 얘기해주신 건 미국의 도로 시스템이 어떻고 메인 스트리트는 어떤 길이고 볼만한 명소는 어디에 있는지 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뻘 되는 나이의 임원 분께서 굳이 시간을 내어 신입사원인 내게 미국 출장지에 대해 설명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들어 경청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씀 중 지도의 여기저기 지역을 동그라미를 치고 나서 내게 말씀하신 건
"자네 여긴 가지 마"라는 얘기였다.
"네? 거긴 왜요...?" 조심스레 묻는 나를 쳐다보며 임원분께서는 손으로 "L" 자를 만들어 보이시며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셨다.
"위험해... 총 맞는 경우도 있어..." 아 "L" 이 아니라 총 모양이었구나.
미국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미국 주재원 생활을 하고 오신 분께서 그렇게 얘기하시니 순간 긴장되는 마음이 커지게 되었었다. 어린 직원이 긴장한 게 느껴지셨는지 임원분께선 웃으며 "조심하란 얘기야"라고 말씀을 이어가셨지만 그 후 얘기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당시 내가 느낀 걱정이 꽤 컸던 모양이다.
얼마 후 함께 해외 출장길에 오른 신입사원 동기들과 LA 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를 빌린 후, 동기가 운전하여 첫 숙소인 윌셔 호텔로 이동하던 때였다.
신호에 걸려 교차로에 정지된 우리 차를 뒤에서 다른 차가 추돌하는 교통사고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가 나도 당황스럽고 무서울 텐데, 미국이란 나라에 처음 도착하여 1시간도 안돼서 인생 첫 교통사고를 겪게 되었으니 모두들 그야말로 패닉에 준하는 공황 상태가 되었다.
함께 이동하던 동기 네 명은 정신 차려 역할을 나눠 두 명은 사고 현장에 남아 대응하고 두 명은 이동 중 봤던 한글 간판의 가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보기로 했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조였는데 두세 곳의 한글간판 가게를 찾아 들어가 다급한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보험사 부르세요"라는 정도의 답변뿐이었다.
그때 그분들의 상황과 속마음을 알 도리는 없지만 이역만리에서는 같은 나라말만 들어도 기쁘고 힘이 된다더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면서 사고 현장에 남아있을 동기들이 걱정돼서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차량은 큰길에서 이동하여 빌딩 사이의 으슥한 길가에 옮겨져 있었고, 동기들은 일단의 흑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광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출장 전 임원분의 충고가 생각나며, '가만 여기가 상무님이 동그라미 치신 곳인가?' 하는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흔들었고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다행히 동기들을 둘러싼 흑인 분들은 사고를 내고 당황해하던 가해차량의 훅인 아주머니 운전자분을 위로하는 중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클을 타고 순찰 나온 교통경찰관을 만나 상황은 금방 수습되었다.
특히 사이클 순찰대원 중 한 분은 팔 근육이 뽀빠이 같은 재미교포셨고, 유창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며 양측의 상황을 정리한 후, 보험사와의 일처리마저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만약 요즘 일어난 일이라면 그 경찰분의 페북이나 인스타 계정이라도 물어봐서 follow 해 도움을 잊지 않고 지냈어야 하는데, 경황없던 중에 충분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범퍼가 부서진 차를 교환하고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고, 원래 네 명의 동기는 둘씩 조를 나눠서 미국 출장에서의 프로젝트를 계획했었지만 절대 헤어지지 말고 넷이 의지하여 다니자고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이동하기 전에 나는 필름을 사려 호텔 안에 있는 기념품샵에 들렀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지금 세대의 사람은 이해 못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카메라에 감광식의 필름을 넣어 사진을 찍어야 했고, 24장 또는 36장의 사진을 찍으면 필름을 갈아 끼워야 했다.
동기들이 아직 전날 사고의 여파로 쉬고 있을 시간에 혼자서 기념품샵에 들러 물건을 사는 경험을 하면 해외에 혼자 와있는 기분도 들고 동료와 섞여서가 아니라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영어를 써볼 기회가 될 것 같아 굳이 혼자 필름을 사러 간 것이었다.
두 명의 계산원이 있는 작은 규모의 기념품 샵이었는데 한쪽에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 예닐곱 명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카운터 한편에 쌓여있는 필름을 보고 계산대에서 주문해야 하는 걸 직감하고 잽싸게 비어있는 계산대로 갔다.
왜 이 줄은 비어있는데 저 일본 관광객 분들은 예닐곱 명이 한 줄로 차례를 기다릴까? 이유를 생각하다가 아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단체 관광객분들이라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쇼핑하려고 한 줄로 서있단 것을 눈치챘다.
나는 계산대의 직원이 보았을 때 저 일본분들과 내가 다른 나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일본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건 또 당시의 감정으로는 식민지배를 벗어나 일본에 좋지 못한 감정이 짙게 남아있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이 든 건 일본인들은 받침이 없는 문자를 쓰기 때문에 받침 있는 발음을 어려워한다는 얘기였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외국어 발음이 없는데 일본어는 받침이 없으니 맥도널드는 마쿠도나루도, 필름은 피루무로 발음한단 걸 들은 기억이 났다.
순간 나는 당당한 마음으로 옆줄의 일본인도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계산대의 점원에게 "필름 플리즈"라고 얘기했다.
저 일본인들은 아마 내가 필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걸 보면 한국인이라고 알아차리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점원의 반응 때문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What?"
"필름" 목소리가 작았나 하는 생각에 난 더 크게 이야기해줬다.
"What?" 점원은 못 알아듣겠단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나는 순간 이게 아닌데 생각하며, 고등학교 시절 영어수업시간을 떠올렸다.
아아 이게 바로 한국인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F와 P 구분의 실수이구나.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시 얘기했다.
"삘름" , "피일름" ... 중간 어디의 발음까지 두세 번 얘기하다가 그게 아니라고 느꼈다.
아아 F와 P가 아니라 L을 R과 구분되지 않게 쓴 건가?
"피이름", "삐일름", "필르음" ....
옆줄의 일본인들이 모두 계산을 마쳐갈 무렵, 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공손하게 구석의 필름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코닥 플리즈"
그러자 점원은 이제 알았단 듯 눈을 크게 뜨고는
"Oh!!! Film" 하고 얘기했는데 내 귀에 그 발음은 "삐이이흐음"처럼 들렸다.
그래도 민족적 자존심이 기동하여 "후지 플리즈"라고 하지 않은 것을 위안하며 값을 치르고 나올 때, 먼저 나온 일본 관광객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당시 나를 중국인으로 봐줬으면 하고 생각이 들었는데 차마 다시 그렇게 보이라고 중국어를 해 볼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무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미국을 처음 도착해 경험한 만 24시간 동안의 기억 중 많은 부분이 생각나는 것은 당시의 기억이 단지 머리에 남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만약 내가 처음으로 미국 출장을 앞둔 후배 사원에게 미리 한두 마디 해 줄 기회가 있다면,
난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첫째. 어렵고 무서운 일은 어디서나 생길 수 있으니 쫄지 말고 잘 보고 다녀라.
둘째. 자신감은 좋지만 쓸데없는 우월감은 좀 더 실력을 갖춘 다음에 보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