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TV 예능 프로그램 중에는 특정 분야 전문가가 출연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는 걸 느낀다.
대표적으로 '차이 나는 클라스', '알쓸신잡', '알쓸범잡', '선을 넘는 녀석들' 등등 TV 채널마다 독특한 형태의 지식정보 프로그램이 다양해졌다.
과거엔 TV를 통해 지식 정보를 접하는 경우는 교양 프로그램을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강의같은 형식 역시 따분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많이 공부하고 배운 사람들 중엔 일반인들과 다르게 좀 너디(Nerdy)한 사람이 많다고 느껴져서 소통의 스타일이나 코드가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엔 예능과 교양의 하이브리드 형식을 통해 출연하는 전문가 역시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참 쉽고 재밌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미 예능 프로그램에서 익숙한 연예인들이 시청자를 대신해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속 시원한 질문을 던지니까 지식 정보가 더욱 어렵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가까와진 지식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다 보면, 내가 이전에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 생각했던 사실에서도 다른 이유와 해석을 발견하기도 하고, 혼자서 끙끙 고민하던 내용들이 과거 어느 시대 어느 사건의 누군가는 비슷한 고민과 판단을 경험했다는 것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역사를 배워야 하고 다른 방면의 일, 다른 나라와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우연히 tvN 채널에서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걸 보았다.
해외여행을 하기 어려워진 코로나 시국을 반영하여, 마치 해외여행을 떠나듯 비행기처럼 꾸며놓은 스튜디오에서 역사 속의 장소를 테마로 하여 강연자가 그날의 주제에 대해 패널들에게 알려주는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날 내가 본 내용은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전쟁의 발발 배경부터 전개 그리고 전쟁이 마무리되고 그 후에 사회에 미친 영향까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전쟁의 전체 과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지만 내가 정말 관심 있게 듣고 되짚어 생각하게 된 부분은 '이아드랑 전투'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아드랑 전투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갈등에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선언한 이후, 북베트남 정부군과 최초로 교전하게 된 정규전이라고 한다.
기동성을 살려 헬기로 전장에 투입된 3백8십여 명의 미군 대대가 이아드랑 협곡에 도착해 정찰을 통해 확인한 건 해당 지역에는 북베트남 3개 연대 2천 명 이상 규모의 병력이 이미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장에 투입되고 나서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생존이 불확실한 상황임을 알게 된 대대장 "할 무어 중령"은 전투를 이어가던 중 승산이 없는 걸 깨닫고는 상급부대에 '브로큰 애로우'를 전달하고 항공 폭격을 요청했다고 한다.
브로큰 애로우는 적에 포위된 상황에서 아군의 희생을 감내하고 미군진지 주변에 폭격을 요청한 것으로, 이런 과정은 후일 영화로도 제작되어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져스'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니 당시의 상황이 그만큼 극적이었던 듯하다.
결국 미국의 폭격으로 미군도 3백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북베트남군도 16백 명 정도가 전사했다니 엄청난 인명사상을 낸 전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아드랑 전투 과정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 부분은 바로 미군 현장 부대를 지휘한 '할 무어 중령'의 당시 역할과 그 상황에서의 판단 그리고, 그 이후 평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무어 중령은 본인의 부대가 이아드랑 협곡에 투입되었을 때 그곳에 자신들보다 다섯 배 이상 많은 적군이 포위해 공격해 올 것이란 걸 알고 투입된 것이 아니었다.
정작 전장에 투입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싸워서 죽지 않고 버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해지고 부대의 온전한 철수가 어렵다고 깨달았을 때, 본부에 '브로큰 애로우'를 전달하기까지 어떤 생각이었을까?
미군 진지 주변에 대해 폭격을 요청하면 자신의 부대도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건 당연히 알 수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확한 보고를 해야 했던 것은 본부가 전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대응 전략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무어 중령의 대대는 피해를 입더라도 전쟁에서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진지 폭격의 결과로 그는 대부분 부대원을 잃었지만 누구도 무어 중령을 패장이라던가 실패한 리더로 부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리더십을 다룬 많은 연구와 저작물이 존재할 뿐이다.
그는 남에 의해 주어진 상황에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보다는 정확한 상황판단을 했으며, 그 결과로 인한 위험상황을 부대원과 같은 장소에서 함께 겪어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현장지휘관으로서 주어진 어느 순간이든 최선을 다하고, 전황을 부풀리거나 감추지 않고 정확히 판단해, 정직하게 보고한 것. 그것이야 말로 현장에 있는 리더가 해야할 일을 모두 온전히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임무를 수행한 현장지휘관을 존중하고 예우를 갖추는 것은, 후방에서 사선을 겪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TV프로그램 속에서 '할 무어 중령'의 판단에 대해 강연자와 출연진의 경의가 표해진 점은 무척 당연하면서도 부러운 상황이었다.
왜냐면 직장이라는 현실의 조직 안에서는 전투현장이라 할 수 있는 고객 접점 현장의 리더에 대해 그만한 역할 기대외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현장의 리더를 그저 쓰고 버려져 소모되는 인력으로 생각한다면, 누가 현실에 충실하고 정확히 판단하고 정직하게 보고하려 할까? 자신이 처한 환경을 정확히 판단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더 적극적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그런 사람들이 인정받아야, 전체 조직이 좀 더 현실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선순환의 구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게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주변에서 현장을 존중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