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의 책임

by 랜덤초이

세상만사가 모두 수학처럼 참과 거짓을 나눠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계란을 물에 넣어 끓이면 삶아져서 고체가 된다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과학적으로 결과를 충분히 미리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기업에서의 의사결정이란 결과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정답을 미리 다 알고 이뤄지는 법이 없다.


시장과 고객에 대한 제한된 정보, 기업이 가진 자원의 한계, 경쟁 관계에 의한 예상치 못한 상황 등등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옳은 의사결정을 하려면 고려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경험에 의존해서 이전에 성공적이었던 판단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과거에 유효했던 판단기준이 현재도 유효하다거나 미래에도 유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과거에 이동통신사들은 휴대폰에 게임이나 음악 같은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는 경로를 독점하고 있었고, 때문에 휴대폰에 탑재되는 서비스는 이동통신사들 간에 상품 차별화 경쟁의 주요 도구였다. 유명한 대작 게임은 특정 통신사 이용자만 접근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이용자들이 앱스토어나 구글 플레이 같은 공통의 콘텐츠 유통 경로를 이용하면서 통신사 간의 서비스 차별화는 그 효용을 잃고 있다. 어느 통신사의 고객이든 해당 단말의 앱 마켓을 통해 동일한 콘텐츠를 다운로드하여 이용할 수 있으니 서비스를 활용한 차별화는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기 힘든 시기가 된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 히트상품이었던 '차량용 내비게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스마트폰 보급이 폭증하면서 휴대폰이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고, 완성차 회사들이 내비게이션을 기본 장착한 차량을 생산해 판매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차량용 내비게이션의 독립된 시장은 급격히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변혁의 시기까지도 과거의 판단기준에 집착하여 애프터마켓용 내비게이션을 제조, 판매하겠다고 판단한다면 그런 의사결정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사결정을 위한 판단기준만큼이나 중요한 게 의사결정의 타이밍이다.

최선의 의사결정을 위해 더 철저하게 많은 고려요소를 검토하고, 고객과 시장을 서베이 하고, 상대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면서 준비하다 보면 결정의 순간은 계속 늦춰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누군가 다른 기업이 먼저 의사 결정해서 움직인다면 그 결과 때문에 회사의 늦은 의사결정은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


'이스트만 코닥'은 카메라와 필름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서, 필름은 코닥이라는 위상을 가졌었지만 카메라가 디지털화되는 변화에 대응이 늦어 파산보호 신청을 할 만큼 위기를 겪었다. 사실 디지털카메라와 관련한 요소기술은 코닥이 먼저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지만 그들이 우위를 가진 시장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오판으로 디지털 전환에 대한 의사결정을 늦춘 것이 패착이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세상은 누군가의 의사결정을 기다려서 움직이지도 않고, 시간이 누군가를 위해 기다리다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보니 결국 불완전한 상황과 불확실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쯤 고민했으면 일단 결정하자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결론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다고 느낄지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특히 그런 의사결정이 아주 큰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일이라면 판단은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결국 의사결정권자는 본인 선택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 부담을 갖고 판단해야 한다.


기업 전체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라면 최종적인 의사결정의 책임은 의사결정권자인 CEO가 갖지만, 책임을 갖는다고 하여 CEO에게만 그 책임을 오롯이 묻는 건 공정한 것 같지 않다.

최종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이뤄지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참여한다.

어떤 사람은 상황정보를 분석하고, 어떤 사람은 대안도 있는지 고민하고, 어떤 사람은 경쟁사의 반응도 예측해 본다. 그런 과정 속에 참여하는 모두가 각각의 의사결정을 하는 건 아니지만, CEO가 충분한 사실과 정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CEO 가 well-informed decision을 하기 위해서는 CEO 개인의 능력과 역량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각 역할의 수행자가 자기가 맡은 역할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정직하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누군가 개인의 책임을 피하거나 이익을 꾀하기 위해, CEO가 불충분한 정보와 왜곡된 사실을 기반으로 의사결정 하게끔 이끈다면 그런 경우는 심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잘 파악된 사실과 분석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CEO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 그리고, 거꾸로 부실한 정보와 조작된 사실로 CEO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

두 가지 잘못된 의사결정의 케이스 중에 어떤 경우가 더욱 회사의 불행일까 생각해보았다.


나의 판단으로는 후자의 경우가 더욱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전자의 경우라면 조직은 건강하지만 CEO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니 적어도 CEO가 판단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제대로 의사결정이 이뤄질 테고 제대로 판단할 줄 아는 CEO로 바뀌면 회사 차원에서도 개선을 기대할 수 있겠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조직 자체가 부정하거나 실력이 없는 것이니 CEO와 무관하게 다른 일이 어떻게 의사결정 되는지도 걱정스럽고 CEO가 바뀌어도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일하는 방식이 함께 바뀌어야 하니 개선에는 더욱 어려움이 따를 것 같다.


판단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결과에 대해 블레임 하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의 과정을 건너뛰고 판단의 결과로만 누군가를 블레임 한다면 나중에 다른 상황이 되어도 그저 의사결정권자 한 명을 희생양 삼아 마음의 후련함 만을 쫓게 될 것이다.


진짜로 뭔가 좋은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을 보려면 그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복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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