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회사는 해외 글로벌 사업자와 맺었던 협력 계약으로 인해 갈등을 가진 적이 있었다.
계약에는 우리 회사와 상대 회사 간의 포괄적 협력이 정의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협력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 회사가 우리 회사 고객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면서 발생하는 수익 중 일정 비율을 우리와 share 하는 기준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대 회사는 자신들의 서비스 플랫폼에 대한 사용자 기반이 조기에 확산되기를 원했었고, 우리는 상대 회사 이외에 마땅한 대안의 협력사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계약은 양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처음 그 상대 회사와 계약을 맺은 부서는 관련한 구매를 담당하는 부서였지만, 계약이 유지되는 수년간 계약 내용에 따른 수익 배분의 정산은 내가 맡고 있는 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수년간의 계약 기간이 지나고 계약 내용의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을 때, 회사에서는 최초에 양사가 합의했던 협력 조건이 더 이상 협상의 대상이 아니게 된 걸 인식하게 되었다.
글로벌 사업자는 이미 세계 시장의 표준처럼 되어버린 자신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전과 같은 조건으로 수익을 배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세계적으로 해당 협력 계약을 맺고 있던 다른 나라의 기업들과도 계약이 만기 되는 시점에 맞춰 협력 계약 조건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회사로서는 그 시점이 언제가 되는가가 문제였지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계약이 갱신될 것이란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 글로벌 사업자와의 재계약 협상 역할은 우리 팀에 주어지게 되었다.
최초 협상의 경우 협력의 범위가 광범위하고 우리가 수익 배분을 받는다는 점에서 회사에 이익이 되는 계약으로 인식되어 많은 부서가 자신들의 역할을 주장했으나, 재계약으로 계약의 조건이 당사에 불리하게 될 것이 명확해진 상황이 되자 이전에 관여했던 조직들은 재계약의 역할이 현재 정산업무를 담당하는 우리 팀에 있다고 주장하고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답답한 상황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마침 팀에는 어려운 일에도 흥미를 갖고 해결책을 고민할 만한 동료가 있었다. 이某부장님은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서자 최대한 재계약을 미뤄서 현재 유효한 계약 내용이 자동 연장되어 적용되도록 하고, 우리 말고도 같은 계약을 맺고 있는 경쟁사들이 어떻게 협상해가는지를 모니터링해서 회사의 이익이 최대한 지켜지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협상이란 게 상대가 있는 것이라 리스크도 물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협상을 지연하다가 결렬되어 우리 고객이 이용 중인 서비스가 중단된다면 회사로서는 커다란 손실이 불가피했고, 우리 회사 말고 다른 회사가 먼저 계약 갱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우리에게는 협상을 해볼 만한 상황이란 게 아예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계약을 지연하면서도 상대 회사 및 경쟁사의 반응에 따라 계속 상황에 대한 판단과 대응이 필요한 피곤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린 살얼음판 같은 긴장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상대 회사는 우리가 계약의 갱신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기존 계약이 만료된 시점부터 당사와의 수익 배분 대상 중 일부에 대해 지급을 중단했었다. 해당 항목은 우리 회사와 협력을 개시하기 위한 Deal sweetener(거래의 당근?)로 주어진 한시적 혜택이니, 기본 계약이 만기 되어 자동 연장되는 동안에는 지급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회사 내부의 법무검토 결과 그들의 일부 지급 중단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계약서 해석에 따라 해당 sweetener 조건에 대해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보수적 판단이 있었다.
여러 압박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약 갱신을 늦추면서 현재 계약 조건 중 우리 회사의 가장 큰 핵심 이익과 관계된 조건이 지켜질 수 있도록 버텨갔지만 회사 내부에서도 우리 팀에 대한 압박은 커져갔다.
"너희들이 계약을 미뤄서 이익을 지켜내겠다고 했으니 최대한 계약시점을 늦춰봐라"
"그러다가 덜컥 상대와 합의하면 연간 사업계획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니 책임져야 할 거다."
"기왕 버틴다고 했으니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텨야 한다." 등등 요구의 수준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반년 이상을 버티고 있을 때쯤엔 회사에서 여러 가지 동기부여가 될 당근도 제시하였다.
당시 우리 부문의 조직장은 정말 현재의 수익배분 조건을 1년 이상 버텨서 연간 사업목표를 지킬 수 있다면 포상을 하겠다는 약속도 공언하였다.
그 후 재계약을 미루는 동안 상대회사의 협력 담당 임원이 바뀌면서 시간을 좀 벌 수 있는 행운도 있었고, 새롭게 협상 파트너가 된 담당자와 수차례 미팅을 거치면서 우리는 수익배분 조건 갱신 시점을 목표한 만큼 미뤄서 다행스럽게 연말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더 이상 계약을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계약을 갱신하기로 동의했지만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지급이 중단되었던 sweetener 조항의 수익배분 지급도 요구했다. 한편으로는 그것까지 얻어내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조건이었으나 법적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회사의 직원으로서 당연히 주장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지금까지 협상 기간 중 일부 지급 중단되었던 수익배분 대상을 연내 일시 정산받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서도 우리 팀에서는 일관된 주장을 지속하여 불리한 계약 갱신 압박을 받던 상황에서 회사의 이익을 그나마 어느 정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연말이 되기 전에 우리 팀은 상대 회사로부터 일시지급 건의 정산을 받게 되었다.
수백억 원에 이르는 현금이 회사로 입금되자 회계팀으로부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요청받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고, 아마도 회사 창립 이래로 단일 거래처로부터의 현금 매출 발생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전표에 결제를 해 볼 수 있었다.
상황의 불확실성이 완전히 제거되고 이제 분명히 결과를 보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회사에 약속했던 목표 이행과 함께 거의 포기할 뻔했던 가외의 성과까지 얻다 보니 팀에서는 일전에 조직장으로부터 약속받았던 포상을 기대하게 되었다.
올해 연말엔 고생한 팀원들과 거창한 회식이라도 할 수 있겠구나 소박한 기대를 갖고 보고에 나선 나는 그러나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발생한 매출은 내년 성과로 인식할 수 있는 건가?"
보고를 받은 부문장의 질문은 내가 아니라 옆에 배석한 부문 기획담당을 향했고,
기획담당은 "발생 시점에 회계 상의 인식이 필요해서 어려울 것 같지만 한 번 CFO 측과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부문장은 나를 보고 얘기했다.
"아깝게 말이야 다음 달에 받았으면 내년 실적으로 잡을 수 있어서 좋았을 텐데 왜 일을 이렇게 멍청하게 해?" 하는 질책의 말이었다.
어려운 협상의 과정을 거쳐 회사에 도움 되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은 순간 식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포상이니 뭐니 하는 약속의 말도 지켜지지 않았다. 실망하게 된 팀의 이 부장님과 나는 그저 우리끼리라도 진심으로 노력한 걸 기억하자라는 위로를 나눠가질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실질적인 이익보다도 부서의 관리적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지만, 지나간 업무에 대해 아쉬움을 가져봤자 좋아질 일은 없었다.
며칠 후 부문장의 스탭으로 일하는 정某팀장이 나와 이 부장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유명한 시내의 양대창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주문할 때까지 나는 정 팀장이 저녁을 사려는 이유가 혹시나 부문장이 앞에선 우리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뒤에서라도 우리 팀의 고생을 인정하고 격려해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마저도 사실은 내 희망일 뿐이었다.
정 팀장은 양대창을 사는 돈이 본인의 팀에 배정된 복리후생 비용이고, 부문장의 반응에 실망했을 우리들을 위로해주기 위한 식사 대접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나와 이 부장은 그 비싼 양대창을 계속 주문해서 먹을 수는 없었다. 정 팀장이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한 호의는 너무 감사했지만 그 팀도 예산이 빠듯할 텐데 눈치 없이 추가 주문을 하기에는 부담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고기 메뉴는 2~3인분 이상이 1인 정량이라는 국룰을 깨고 자리를 정리한 후, 우리는 을지로에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성과란 진짜 무엇일까?
수시로 바뀌는 경영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대안을 고민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정상일 텐데, 미리 세운 목표를 지키는지 하는 것만 중요하고 올해의 목표에서 남는 성과는 내년으로 미뤄서 성과로 주장하자는 게 진짜 합당한 일일까?
당시에 우리는 그런 이유로 열심히 일한 직원들이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비난받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도대체 왜 회사에서 성과를 판단하고 인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저런 태도를 취할까 하는 아쉬움의 얘기를 한참 나눴던 것 같다.
십 년이나 더 나이가 든 지금도 당시를 되돌아보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잘 모르겠다.
회사라는 조직의 생리가 그냥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는 너무 싫다. 그런 걸 인정하고 이해하다가는 각자의 개인이 회사라는 조직의 성과보다는 개인의 성과를 꾸미기에 열중하는 걸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 같고, 그런 회사가 잘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에 이건 아닌데 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두 분은 여전히 회사에서 서로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이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비록 높은 자리에 있는 조직장이 또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일하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한 두 명 지인이 있다면 삭막한 조직생활도 버텨낼 만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