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CEO가 주재하는 회의 중에 활발한 토론과 의견교환이 이뤄지는 건 참 보기 힘들다.
CEO 회의에서 논의되기까지는 수 차례 사전 검토 과정을 거치며 이슈와 논의 포인트가 정제되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회의 참여자가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제시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참여자 누구든지 아무 생각이나 얘기하다가는 회의가 효율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워질 수 있고, 논의되는 사안의 이해관계가 특정 부서에 첨예하게 연관된 경우 다른 부서 사람이 한 마디씩 끼어들다가는 논의가 산으로 간다거나 부서 간의 알력으로 비화되는 수도 있다. 또한 회의 참여자들이 은연중에 CEO의 의견과 판단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이 소신껏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건 어렵게 되기도 한다.
CEO가 평소에 강한 권력행사나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경우라면, 사람들이 CEO 회의에서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주장하기는 더욱 힘들다.
뭔가 잘못 얘기했다가 자기 생각이 CEO의 생각과 다른 경우 심하게 질책당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회의 분위기가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효과적인 결론을 얻기 위해 적절한 방식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CEO도 사람인데 그가 보고를 받고 논의하는 모든 주제에 대해 다 제일 잘 알고 있을 수는 없고, 어떨 때는 의사결정에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본인의 생각은 확고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거나 누군가의 생각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라도 회의 참여자들 간에는 적절한 의견 교환 과정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CEO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회의에서 타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고민하기도 한다.
내가 처음으로 CEO 주재의 임원회의에 배석하여 진행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던 시기에, 당시 CEO는 보고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직접 주도하여 논리적인 말투로 강평하듯 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결론에 가까운 의견을 제시하고는 직후에 다른 임원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묻곤 했다.
이미 CEO의 생각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한 두 명 외부 영입 전문가 정도만 눈치를 보면서 CEO 의견이 합리적이란 점을 보충해서 설명하는 의견을 내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임원들의 참여가 미흡한 체로 회의가 진행되자, 어느 시점부터 CEO는 결론을 내기 전에 임원들 모두의 얘기를 듣겠다면서 회의 말미에 시계방향으로 한 사람씩 의견을 내보라고 했다.
마지못해 돌아가며 의견들을 얘기하기는 했지만 순서가 뒤로 갈수록 마땅히 할 말들이 없어져서인지 그다지 참신한 의견이 계속 나오지는 못했고, 기다리며 듣고 있는 CEO의 표정에서는 점점 지루하거나 답답함을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CEO는 임원들이 의견을 얘기하는 동안 휴대폰의 내구성을 검증하듯 플립을 계속 열고 닫았고, 규칙적으로 울리는 ‘딱 딱’ 휴대폰 플립 소리는 임원들의 의견을 재촉하는 시계 초침 소리이거나 본인의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기 위한 목탁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 후로 겪어본 다른 CEO 중에서는 회의 참여자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회의 시작 전에 간단히 게임을 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CEO를 포함해 회의 테이블에 앉은 참여자들 모두가 "3!6!9!(삼육구)" 게임을 하고, 걸리는 사람은 페널티로 만원을 내서 모아진 돈은 좋은 목적으로 기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자는 취지도 좋고, 게임의 결과로 선행을 함께 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거양득의 의도로 시행된 제도였다. 하지만 좋은 목적에도 불구하고 CEO와 함께 하는 게임은 긴장을 풀기보다는 긴장을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었다.
CEO 앞에서 실수해 단순한 게임의 패자가 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하게 긴장한 어떤 사람은 '삼육구'를 시작하면서 ‘일’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라고 외쳐서 다음 순서의 사람이 ‘둘’이라고 할지 ‘이’라고 얘기할지 고민하게 만들었고, 또 다른 이는 게임 시작 전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하고 네 번의 준비 구호를 외치지 않고, '삼육구' 하고 한 번만 말한 뒤 '일'이라고 외쳐 박자 맞춰 기다리던 다음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숫자를 얘기하지 않고 박수를 쳐야 하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박수와 숫자 구호를 동시에 하고는 세상 무너진 듯 고개를 숙이는 경우도 있었다.
긴장에 의한 누군가의 실수는 다른 참여자들이 웃게 만드는 포인트가 되기도 했지만 정작 실수한 사람 본인은 보고와 회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잔뜩 주눅 든 상태로 회의에 임하게 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CEO가 회의를 좀 더 좋은 분위기에서 생산적으로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이런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억을 되짚어 지난 상황을 반추해 강조하고 싶은 건 회의 방식의 부작용과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CEO도 타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여러모로 방법을 고민하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회의를 통한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CEO가 항상 정답에 가까운 결정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그런 게 가능하다면 왜 수많은 기업이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기도 하고 흥망(興亡)의 역사를 겪게 되었겠는가?
특정 시점에는 본인의 판단이 최선의 선택인 줄 알았더라도 나중에 검토내용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누군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보고를 해서 CEO가 실수할 수도 있다. 부실하고 부정확한 보고를 바탕으로 논의가 되고, 아무도 소수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한다면 그 판단의 결과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CEO 회의가 잘 검증된 옳은 의사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작동되려면, 회의는 사실을 기반으로 판단된 제대로 된 정보와 다른 관점의 해석도 함께 다루어지는게 중요하다.
물론 CEO의 판단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가 관여하는 모든 의사결정 과제를 그렇게 심도있게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라면 당연히 좀 더 제대로 된 판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과 안전 장치도 필요한 법이다.
과거부터 중요한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에는 일부러라도 선의의 비판자를 두는 'Devil’s advocate' 같은 제도가 있었던 것도 잘못된 결정의 우(愚)를 범하지 않기위한 장치였다.
결과적으로 나와 다른 의견과 비판이 있더라도 공정하게 논의되어 제대로 판단의 근거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역할은 어떤 논의 주제가 그런 노력이 필요한 정도의 사안인지 판단하고, 회의 형식에 대한 제도적 개선도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기내어 자신의 의견을 낸 사람들이 그 결과로 무시받고, 무안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게 배려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 수준의 역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형식적 노력도 조직의 침묵을 막기는 어려워질 것이고, 그 결과로써의 폐해는 커져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